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 7월 4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11세의 어린 소년이 대보(옥새)를 받고 즉위하라는 도승지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울부짖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대신과 예관, 삼사가 대보를 받을 것을 재촉해도 소년은 슬픔에 겨워 울부짖을 뿐 듣지 않았다. 이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와 재차 대보를 받을 것을 청하자 비로소 받아들여 즉위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정조를 잃고 울부짖던 이 어린 소년이 조선 23대 왕 순조(1790~1834)다.
순조의 즉위가 끝나자 곧이어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의 예를 희정당에서 행한다. 정순왕후를 비롯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 벽파는 정조의 국상을 맞아 경사났다고 춤을 출 판이었다.
우선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 날 당장 사악한 사교를 물리친다는 '척사(斥邪)'를 들먹였고 몇 달 뒤인 순조1년 1월 10일, 악명높은 오가작통법을 발동해 천주교인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편성하는 호적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 남은 씨앗)이 없도록 하라." (순조실록 1년 1월 10일)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남인을 제거하려는 목적인 '천주교도의 씨를 말려버리라'는 정순왕후의 명으로 신유박해의 대량살육이 자행되고 벽파의 시대는 문을 열었다.
4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가 일구어놓은 업적을 무너트린 벽파는 시파와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틀어쥔 권력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1805년(순조5년) 1월 12일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몰락해버린다.
이후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조정은 안동 김씨로 채워지고 이후 60년간 일당 독재체제가 이어진다. 결국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는다. 안동 김씨의 정치 독점을 견제할 세력이 없으니 조선 사회가 썩지 않는다면 기적이었다.
왕비마저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었으니 안동 김씨에게 둘러싸여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던 조용하고 마음 여린 순조는 정말 살 맛이 싹 가셨다.
민란은 민초의 반란
전정·군정·환곡에서 탐관오리의 비리가 공공연히 자행돼 백성이 부담하는 세금과 곡식, 군포는 점점 무거워졌고, 양반과 지주들의 세금까지 내야했던 민초들은 등골이 휘어질 정도로 일해도 생계조차 이을 수 없었다. 순조 즉위로 시작된 19세기는 살기 위해 일으킨 백성들의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홍경래 난을 비롯한 수백 차례의 민란은 정권교체나 기득권 획득을 위해 일으킨 것이 아니고 오직 죽느냐 사느냐는 절박함에 놓인 생존을 위한 민중 항거였다. 민초들이 일으킨 난은 정부군과 관군에 의해 평정되곤 했다. 그럼에도 굶주림과 학정에 성난 백성들이 일으킨 민중 봉기가 계속 일어나게 된 것은 안동 김씨가 독점한 중앙의 정치체제가 문란해지자 지방관료들의 기강도 해이해지고 부패가 만연한 것이 원인이었다.
민초들이 일으킨 난은 철종대까지 이어져 조선을 지탱해왔던 봉건사회체제의 붕괴를 불러왔다. 이 민중 봉기는 철종13년(1862년) 2월 환곡의 문란으로 허덕이던 경상도 진주 백성들의 무력 봉기가 일어나면서 극에 달한다.
수만 명의 백성들이 관료들이 빼돌린 분량에 대한 환곡의 부당한 통환(가구별로 강제로 분담시키는 환곡)철폐와 도결(환곡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 부담 지우는 할당곡식)의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중앙정부도 다급해졌다. 대규모 진주 민란으로 체제붕괴의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민란은 삼정의 문란이 원인이라 그 대책이 대두됐으나 용두사미에 그쳤다. 정작 백성들이 원하는 정책은 탐관오리와 안동 김씨 문중의 기득권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주민란의 영향력은 후에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항쟁으로 이어졌다.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는 순조의 고민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순조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자신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비로 삼는다. 그러나 풍양 조씨 역시 민생안정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을 확대만을 위해 안동 김씨와 싸움만 머리 터지게 벌인다.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싸움박질을 한심해 하던 순조는 대신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만 몰두한다고 한탄한다.
순조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세운 또 다른 계획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일이었고 효명세자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안동 김씨를 잘 견제하던 효명세자는 순조 30년 윤사월 22일 객혈을 하며 앓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던 효명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보름도 안 된 5월 6일 타계한다. 효명세자 역시 정조의 죽음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약원에서 계속 달여올리는 약에 직접 처방을 한 것도 정조와 다를 바가 없다. 발병하기 직전까지 전곡 관리를 철저하게 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정사를 멀쩡하게 돌보던 22살의 젊디젊은 세자가 병석에 누운 지 13일 만에 죽은 것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고 순조는 그들의 그늘에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와 민란으로 대변되는 순조대는 11세 어린 소년이 통곡하면서 왕위에 오른 순조 자신에게나 조선으로서도 혼란과 혼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순조의 죽음으로 효명세자의 아들 왕세손 헌종에게 대보가 돌아가지만 헌종은 8살에 불과한 어린애였다. 어린애가 왕위에 오르자 안동 김씨 순조비 순원왕후(1789~1857)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조선 민초들의 고난은 계속된다.
인릉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태종의 헌릉 오른쪽에 자리잡은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가 잠든 왕릉이다. 예식이 아니면 비단 옷을 입지 않고 무명옷을 입어 매우 검소했던 순조는 화를 잘 내지 않고 말이 드문 온화한 성격이었다. 농사의 어려움을 알고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을 정도였고 음식도 간소하게 차리도록 했다.
순조의 이런 성품으로 인릉이라는 능호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일국의 국가경영자로서 부족한 정치력으로 안동 김씨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과오는 면죄되지 않는다.
순조는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 오른쪽에 장사지냈으니 철종 7년(1856) 10월 11일 대모산 태종의 헌릉 오른쪽으로 천장한다. 구 인릉의 현궁(관)을 9월 15일 파내어 10월 6일 발인, 대모산으로 옮겨온 뒤 10월 11일 장사지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철종은 9월 1일 “인릉을 천봉할 때에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대여를 영곡(迎哭)하고, 그대로 따라 신릉(新陵)에 나아갔다가 현궁을 내린 뒤에 환궁하겠다"고 선언한다.
보지도 못한 순조에게 그렇게 애틋한 효심이 나올까 의심스럽지만 허수아비 왕 철종으로서는 천릉이나 종묘 제사에라도 지극 정성을 들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발판을 탄탄하게 닦아놓았던 순원왕후가 1857년(철종6년) 69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자 순조와 합장된다.
안동 김씨를 제거하려고 고심했지만 능력이 부족해 나라를 혼란에 몰아넣은 순조가 45세에 죽었지만 조선을 말아먹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순원왕후는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 옛날 죽은 왕의 무덤을 돌아보면 인과응보의 법칙이 반드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릉 역시 헌릉만큼은 아니지만 올려다보면 "저기 올라가려면 힘 좀 들겠구나" 한숨이 나올 정도로 높은 능상에 있다. 능상에 오르면 얼핏 보기엔 다른 왕릉과 다를 것 없는 능침이지만 혼유석이 하나밖에 없어 이 또한 힘없는 왕의 상징인 양 보인다.
혼유석은 왕과 왕비의 혼령이 쉬는 의자이기에 합장릉일지라도 왕과 왕비 몫으로 반드시 두 개가 놓인다. 혼유석마저 생략한 인릉은 순조의 모습처럼 보여 서글프다. 순조의 혼유석 생략에서 무너진 전통 조선왕릉 장법은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의 삼연릉(경릉)에서 극에 달한다. 이 역시 왕권을 능가한 권력으로 왕의 능멸을 서슴지 않은 안동 김씨의 작품이다.
어쨌든 지나간 역사는 반추할 수 있을 뿐 되돌릴 수는 없는 일. 국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헌인릉 대모산은 산책로가 개방돼 있어 인적 드문 이곳에 오면 아름다운 숲을 즐기며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산책 도중에 혹시라도 국정원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금물이다. 보기에 별 거 아닌 건물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공위성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촬영하는 시대에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 사진을 찍는다고 무슨 대단한 국가 기밀이 새어나갈까. 더구나 맘만 먹으면 들키지 않고 폰카나 디카로 얼마든지 촬영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능상에서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오는 즐비하게 늘어선 국정원 건물들을 내려다보다가 괜히 화가 치밀어 툴툴거렸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이른바 박통 군사정권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떡을 만지면 콩고물이 묻는다'는 명언(?)을 남긴 이후락이 썼다는 글귀가 갑자기 떠오른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라는 비웃음을 받는 일이 국가권력 기관에서 벌어지는 것은 변한 거 없다. 금지할 걸 금지하라 해야지. 정말 참여정부 시대에 열린 국정원을 표방한다면 말도 안 되는 저 놈의 쓸모없는 촬영금지 사항부터 폐기 조치해야 할 것이다.
순조의 능상을 돌아보며 "쓰잘 데 없는 인품을 과시하지 말고 옆에 있는 선조 태종의 기상을 반의 반만 닮았어도 조선이 그 짝 안 났지!" 어이없는 화풀이를 하고 내려왔다. 생각해보면, 시간의 흐름이란 역사의 냉혹함과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 개개인 인생의 절박함과는 관계없는 것을. 그래서 역사를 보려면 마음부터 비워야 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