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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의 강원도 원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에 들렀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본 몇 가지 잔상들

이곳은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이 있던 곳이다.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 곳에서 살다가 명성황후(1851-1895)를 낳았다.

명성황후의 어릴 적 이름은 민자영이며, 태어나서 8세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고, 16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 사랑채, 별당채를 복원하였다.

▲ 명성황후 생가
ⓒ 최장문

▲ 민유중 신도비
ⓒ 최장문
비석 받침돌의 거북이가 고개를 '휘-익'돌려 민유중의 묘소를 바라보고 있다. 명성황후가 생사의 고비 고비에서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을 향해 애틋함과 존경심을 담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 민유중 신도비2
ⓒ 최장문
신도비의 받침돌인 거북이의 디테일한 조각과 지붕돌 밑에 새긴 용무늬 등에서 구한말 여흥 민씨의 세도를 알 수 있을 듯했다. 비문에 빼곡히 새겨진 글자들은 무언가 더 많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했지만 읽을 수 없는 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 명성황후 기념관
ⓒ 최장문
생가 바로 오른쪽에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는데 '애완동물 출입금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순간 기분이 씁쓸했다. '개똥녀' 생각도 나고 애완동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생각도 나고….

▲ 명성황후 가계도
ⓒ 최장문

▲ 전시물 중 하나인 송준길 편지(書簡). 실제 한문 서간과 해석문을 함께 전시하니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기뻤다. 민유중 신도비에서 느꼈던 최소한의 답답함은 없었다. 아쉬운 것은 다른 서간들은 본문해석이 아닌 짧은 설명만이 놓여있었다.
ⓒ 최장문
간 뒤 어찌 편지가 없느냐. 그립고 그립구나.
민참봉은 벌써 가서 뵈옵고 상의를 하였느냐, 아니냐, 궁금하다.
내일 일은 어찌 할려고 하느냐? 지극히 염려되는구나.
모든 일을 십분 신중하고 힘써서 하거라.
바빠서 이만 줄인다. (10월 20일 할아버지가)


인현황후의 외할아버지이며 명성황후가 매우 존경한 동춘당 송준길이 손자에게 보낸 편지였다.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틋함이 글자 글자에 묻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여흥 민씨와 충청 은진 송씨는 인척(姻戚)관계였다. 민유중은 바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생이었으며,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척이 되었고, 이후에 두 가문은 노론 중에서도 핵심가문이 되었다고 함께 온 송성빈 선생님(충남여고)이 설명해 주었다.

인현황후와 장희빈의 슬픈 인연, 후궁인 장희빈 아들의 세자책봉을 둘러싼 송시열의 유배와 죽음. 명성황후의 잔인한 죽음. 어찌 보면 정치권력이란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 같다. 가문과 가문을 결합시키고, 정치적·인간적 사랑도 필요하고, 때로는 죽음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한다. 철새 정치인들과 장일순 선생을 생각하며 장호원으로 향했다.

장호원에 남아 있는 명성황후의 흔적과 <임오유월일기>

승용차로 30분을 달려가니 장호원이었다. 장호원의 한 중앙에는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이 흐르고, 150미터 남짓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현재 충북쪽은 음성군 감곡면이 되었고, 경기쪽은 이천시 장호원읍이 되었다. 사람들은 한때 음성장원, 이천장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 장호원 중앙에 있는 청미천과 장호원교. 다리를 건너면 이천 장호원이다.
ⓒ 최장문

▲ 1956년 음성장원 전경
ⓒ 감곡 성당 100년사 화보집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궁궐을 탈출, 피신해 이 길을 따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갔다고 한다. 황후가 아닌 모습으로 장호원까지 가면서 만난 사람들과 산천은 분명 예전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응식은 명성황후의 조카이면서 충주 목사였다. 임오군란때 명성황후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것을 계기로 이후 출세의 길이 열렸고, 집은 109칸으로 크게 개수되었다. 이용익 또한 명성황후의 눈과 귀가 되어 서울과 장호원 왕복 400리 길을 발 빠르게 움직였고, 이후 정계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 매괴 중·고등학교.
ⓒ 최장문

▲ 명성황후 피난처 표지석
ⓒ 최장문
현재 민응식의 집터에는 성당이 들어서 있다. 매괴(玫瑰) 성당이었는데 을미사변이 끝나고 얼마 안되어 민응식의 집을 싼 값으로 천주교 측에서 매입하였다고 한다. 매괴 성당은 1996년에 100주년인 성당이었다. 옛 성당 자리엔 매괴 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학교 운동장 한켠에 명성황후가 피난처였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성당은 조금 위로 올라가면 나지막한 야산의 중턱에 세워져 있는데, 매괴는 장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매괴의 성모 성당'이라 하였다.

조선의 끝과 근대의 시작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4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명성황후. 1985년, 을미년에 당한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녀의 다른 삶을 말하기에 미안하게 한다.

지난 7월에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 51일에 대한 행적이 담긴 <임오유월일기>가 처음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었다. 민응식의 후손이 대전향토사료관에 고문서를 기증하는 과정에서 발견 된 이 문서에는 명성황후가 만난 사람, 식사 내용, 몸 상태, 이동경로 등을 8쪽 분량으로 기록해 놓았다고 하니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임오유월일기가 공개되면 다시 한번 장호원에 찾아와 역사적 상상을 해보고 싶다.

일죽 IC를 통해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3박 4일 동안의 답사가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잊지 못할 사람들과 역사를 보았다.

다음 겨울 방학엔 영산강 주변에서 전남역사선생님들이 <호남문화의 원류,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답사 안내를 한다고 한다. 행복한 기다림을 가슴에 담는다.

덧붙이는 글 |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전국의 역사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자율적인 모임이다. 방학마다 지역을 돌아가며 3박 4일의 자주연수를 한다. 낮에는 지역의 역사를 찾아 답사하고, 저녁에는 학교 현장에서 역사교육에 대한 수업사례와 초청강연을 한다. 그리고 아주 늦은 밤에는 자율적으로 사람과의 대화를 한다. 

이번 연수를 준비해주신 전국역사교사모임 집행부 선생님들과 행사를 진행해주신 강원모임, 경기모임 선생님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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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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