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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의 긴 철로 구성되어 있는 장항선….

1922년 개통되어 사람의 나이로 치면 이제 팔순이 넘었다. 팔순이 다 된 노인들도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지난 팔십년 이상을 충남인을 비롯해 이곳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철도인 장항선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본 기사에서는 18일 107주년 철도의 날을 맞아 충남인과 삶을 같이한 장항선 철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일본 사람에게 판다"... 풍설은 사실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항선이 서울역, 또는 용산·영등포역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장항선의 시작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세워진 천안역이다. 1922년 장항선의 모체가 되는 충남선을 개통하면서 더욱 규모가 커졌다.

장항선은 개설 당시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충남 천안-온양-예산-삽교-홍성-광천-보령-웅천-서천-장항 등 크고 작은 25개 도시를 연결하며, 사람과 산업자원을 목적지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내에 장항선을 비롯한 철도가 도입된 것은 미국인 사업가 모스에 의해서였다. 모스는 당시 주미 참차관으로 있던 이완용을 설득하여 고종의 허락을 얻어 철도부설을 하려고 입국했다.

그는 1896년 3월 경인간 철도부설권을 얻어냈고, 이후 철도개설에 대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자본주를 찾았다. 당시 이러한 내용의 소문이 퍼져 독립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근일에 일본 신문에서 조선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서울-제물포 철도를 미국 사람 모스씨가 일본 사람에게 팔아 일본 사람이 그 철도를 상관한다는 말이 유행하나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중략)… 이런 풍설을 믿지 말지어다. (독립신문, 1887년 7월 10일자)"

그러나 곧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 되어 그는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게 넘겼고,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서울 노량진과 인천 제물포를 오가는 경인선을 개통하였다. 이것이 국내 철도의 시초가 된다.

조선의 곡물·광물자원을 일본으로 나르던 장항선

▲ 장항선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 김봉덕
그렇다면 장항선은 어떤 계기로 개설된 것일까?

청운대 김경수 교수는 "장항선은 충남 서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광물자원들을 일본으로 원활하고 쉽고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개통되었다"고 말한다. 즉, 장항선의 건립된 목적 역시 일제의 식민지배정책과 직결된 것이다.

당시 충남 최대의 항구도시인 장항, 광업지대인 보령 그리고 아산·예산·서천 등의 곡창지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충남서북부 지역의 식량자원과 광업자원을 일본으로 원활히 이동할 수 있게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의해 장항선은 건설됐다. 일본 수탈정책의 산유물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일본의 수탈정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있다. 장항선의 종착역이자 전형적인 항구도시인 장항읍이다.

1918년 일본은 쌀값이 폭등하여 일본 각처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이용하여 국내 쌀을 일본으로 유출하기에 이르렀고, 군산항을 통한 수송이 시간과 임금이 많이 소요되자 군산항과 가장 가깝고 큰 선박을 정박할 수 있는 장항항을 개발하여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수송한 쌀을 장항선을 이용하여 장항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려 했다.

또한 일제는 이러한 쌀 수탈에 그치지 않고 장항제련소를 건립하여 광업자원수탈 기지로 삼기도 하였다. 1935년 세워진 장항제련소는 국내의 기업이 인수해 현재에는 동제련만 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에서 1965년부터 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는 최상구(장항읍, 61)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서천뿐만 아니라 충남에 있는 쌀을 여기에서 정리해서 다가져갔지 그때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쌀은 다 가져가고, 콩깨묵 같은 거만 줬다는 거지. 그만큼 고생을 시킨 거지."

"생선파는 아줌마들이 농촌가서 해물 팔았지"

1945년 광복 이후 국내 철도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철도운영을 총괄하는 교통국이 만들어졌고, 이후 운수국·운수부로 개칭되면서 발전하였다. 장항선도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국유화되어 운수부에 귀속되었다.

당시의 운행되었던 기관차는 증기기관차로 일본식민지 시대의 기관차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미국식 명칭인 "mikado"와 "racific"을 일본식 발음인 "미카"와 "파시"라고 불렀다. 지금은 기차가 발전되어서 현직에서 운영되지 않고 있지만 철도박물관에 가면 그 거대한 몸체를 만날 수 있다.

▲ 장항선(종착역)에서만 볼수 있는 턴테이블. 턴테이블은 기차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기계장치.
ⓒ 김봉덕
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한 장항선. 우리 민족의 최대 아픔인 한국전쟁에서 다른 철도와 마찬가지로 전시수송체제로 바뀌었고, 전쟁을 피해 떠나는 피난민의 수송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장항선 출발지인 천안역을 1959년 새롭게 복구하였다. 또한 디젤기관차 26대를 수입하여 장항선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배치시켰다.

장항선은 철도시설의 발전과 함께 산업역군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았던 충남서북부 지역뿐만 아니라 가까운 전라북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까지 소비지에 빨리 옮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용대(아산시, 62)씨도 "생선파는 아줌마들이 아침 일찍이 생선통을 머리에 이고 군산선착장에 가서 해물받아다가 농촌가서 팔았다"며 당시의 모습을 회상한다.

여름엔 하루 1만2000명이 장항선 타고 바다로

철도가 국내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각별하다. 장항선도 충남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기능을 다양하게 수행하고 있다. 서해안 최대의 관광지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충남 보령시도 장항선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보령시는 지금은 관광산업으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서해안 최대의 탄광지역이었던 곳이다. 1967년 9월 영보탄광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탄광 46개가 생겨났고, 1970년대 중동전쟁으로 인한 석유 파동시 우리나라 경제에 많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령의 석탄산업은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 폐광이 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대량으로 신속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장항선과 연계한 산업철도인 남포선이 4.3km의 짧은 거리로 1964년 개통되기도 하였다.

과거 경제력의 원동력이 됐던 석탄산업은 이제 보령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고부가가치 산업이라 불리는 관광산업이 보령을 이끌어가고 있다. 여름철이면 하루 1만2000여명이 장항선을 이용하여 보령시를 방문하고 있다.

"예전에는 '쓰리꾼'도 많았지"

▲ 기관차 내부와 로찌를 잡고 있는 기관사
ⓒ 김봉덕
지금도 장항선을 이용하는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평일에 기차를 타고 서너 명이 기차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렸을 적 향수에 젖어 개떡과 김밥을 정성스럽게 싸가지고 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지나가는 내 동료인 승무원에게 나누어주는 모습도 장항선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예산역에서 장항읍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는 이막내(47)씨는 기자가 장항선에 대한 기억이 있냐고 묻자 "지금은 되게 편한 거야, 그 때는 파란의자가 양쪽에 버스처럼 있어서 불편했지"라고 장항선의 추억담에 대해 선명하게 회상한다.

장항선의 처음이자 마지막(?)역인 장항선에는 승무원 기숙사가 있다. 이곳에서 장항선에 한 평생을 몸담고 1999년에 퇴직하였다는 채규윤(65)씨를 만날 수 있다.

"1971년에 오니까 그때만 해도 쓰리꾼이라고 그 사람들이 성행해서 우리가 잡지를 못했지. 잡으려면 기차에서 뛰어내리니까…. 장항역에 들어올 때면 망대 있는데서 뛰어내렸지…. 잡지를 못하고 손님들이 와서 돈 없어졌다고 말하고, 그때에는 다 기차만 이용하고, 완행만 타고 다녔지…. 기차가 노후해서 기차객차에 난로 태워서 불나고, 불끄랴, 승객 도와주랴. 차장들이 고생 많이 했지."

장항선은 장거리 기차에 해당되기 때문에 두 명의 기관사가 교대로 운행을 한다. 기관사 그들이 말하는 장항선의 기억은 어떠할까?

장항역에서 만난 한 기관사는 "기관사들이 처음 운전하는 것을 '로찌'를 잡는다고 한다. 장항선에서 (첫 운전을) 경험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종착역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노랗게 나왔다"며 장항선에서 첫 운전을 했을 때 경험을 말했다. 그는 "가끔 철길에서 사상사고가 나고, 건널목에서 사고가 난다, 불의에 인명사고가 났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팔순의 장항선, 다시 젊어진다

산업 발전은 교통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과거 충남지역의 경우 일제시대에 개통된 장항선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소규모의 지방도로가 이러한 장항선과 연계돼 일제수탈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건설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장항선과 연계되는 주요 도시의 도로포장율은 점차 확대되었고, 자동차의 등록율도 매우 증가하였다. 특히, 지난 2001년 개통한 서해안고속도로의 경우 장항선 구간과 근접하게 건설되어 장항선의 위기를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쟁자들 때문에 장항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의 수는 해마다 9% 정도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 충남선 철도기공식 장면
초창기 선로를 그대로 유지하고 운행하고 있는 장항선, 이제 사회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장항선의 문제점 중 하나였던 직선화 공사인 장항선 개량화사업이 지난 2000년 착공되어 현재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다.

장항선에서 지난 1977년부터 근무하고 있다는 권홍식 대천역장은 "주포-대천-남포선은 2007년 6월 30일까지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며, 보령시의 경우 대천역 신역사를 준공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신역사가 들어서면 보령시내의 중심권이 이동되기 때문에 지역경제 및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장항선. 다른 철도도 그렇지만 그동안 국내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다. 장항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함께 했고, 지역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점차 발전되고 있어도…. 팔순이라는 세월동안 항상 그랬듯이 장항선은 앞으로도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장항선에 대한 추억, 기차에 대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경기도 부곡역 주위에 위치한 철도박물관을 찾는 것을 권하다. 이곳에서 장항선 역사와 관련된 각종 기차와 역사사료를 만날 수 있다.

또한 가을은 홍성의 광천토굴젓 새우젓 축제, 예산사과 축제, 남당리 대하 축제 등 충남 서해안의 특산물 축제가 풍성하다.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충청도의 맛과 멋을 느끼기 위해 장항선을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 9월 18일 철도의 날입니다. 
* 충남영상뉴스 www.cnnews.co.kr에도 게재되며, 다큐멘터리 장항선 이야기도 동영상 서비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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