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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악동들에게 받았던 반성문. 세월따라 빛바랜 추억만큼이나 누렇게 떴다. 어제는 스승의 날, 우르르 몰려온 제자들과 반성문을 펼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골동품 가치가 있지 싶은데 살래 말래! 아니면 니 마누라나 자식한테 팔란다! 농담 어린 협박에 대답 대신 살살 비비며 내미는 술맛이 그만이다. 반성문 1탄 2탄 3탄까지 쓴 왕년의 싸움꾼 명이는 벌써 취했다. 마누라는 괜찮은데요 자식한테는 안됩니다!

반성문도 베껴 썼던 철이는 아까부터 딴청을 부린다. 제가 왜 젤마 꺼를 베껴요, 젤마가 제 것을 베꼈지요! 한바탕 웃는 통에 옛날의 잘못은 웃음으로 뒤범벅이 되고 만다. 사업 잘하는 백 사장은 문장력도 뛰어났다. 오늘은 복도를 닦으며 마음의 때를 말끔히 닦아야겠다고.…"

▲ 이내길 효암고 교장.
ⓒ 효암고
이내길 양산 효암고 교장이 펴낸 <쓴맛이 사는 맛>이란 책에 쓴 글이다. 그가 초·중·고교 교사에서 대학 강사까지, 공·사립학교 평교사로 있다가 사립고교 공채 교장을 거치면서 부대꼈던 사연들을 담은 책이다. 그는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일본어도 익혀 <견공하찌> 등 3권의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

평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받았던 800여통의 반성문이 중심 소재다. 반성문에 대한 이내길 교장의 의미는 대단하다.

"원고지는 빛이 바래 누렇게 떴지만 '문제 아이들'의 진심과 추억이 담겨있는 것 같아 남겨두고 가고자 하는 뜻도 담았다, 사고뭉치 골통들의 이야기, 수필도 아닌 소설도 아닌, 회고록은 더더욱 아닌 글, 형식도 없고 격식도 갖추지 않은 글이지만 반성문을 썼던 그네들이 지금은 더 열심히 살아가기에 이 글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악동들의 반성문을 바탕에 깔아보면 분명 길은 있을지니. 그래서 나의 반성문을 악동들 앞에 먼저 내놓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본다. 그런 다음에 함께 살아온 벗들의 반성문을 같이 읽고 싶다. 술잔으로든 문자로든."

초등학교 초임 교사로 만난 제자들 지금도 만나

▲ 이내길 효암고 교장이 <쓴맛이 사는 맛>이란 책을 냈다.
ⓒ 윤성효
책에는 모두 42가지의 소제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교장은 졸업생까지 걱정하면서 글 곳곳에 제자 사랑이 듬뿍 베여 있다.

"요란함이 온 집을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가면 적막감이 엄습한다. 이제 제자들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지. 그런데 그 별난 녀석들 집에 가긴 갔나? 아니면 또 옆길로 새었나. 차는 두고 갔는지? 또 아니면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닌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걱정은 매한가지."

그는 초등학교 초임 교사 발령을 받고 그 때 가르쳤던 제자들을 아직도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가 군대가는 날 적은 글을 보자.

"입대 전날. 오후 수업을 끝내고 작별인사를 했다. 착잡하고 씁쓸한 마음이 가슴을 짓누른다. 주어진 시간들이 너무나 빠른 것 같아 꿈 속에서 허둥대는 기분이다. 책상 정리를 하는데 애들 몇몇이 집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주위를 맴도는 것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얼만 안 되는 시간들이어도 정이 많이 들었는가 보다. 보채는 어린아이마냥 떨어질 줄 모르는 정들을 재우고는 교문을 나왔다. 홀가분해지고 싶어 머리를 깎았다. 그래도 미련은 남았다. 학교 옆 가게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가 부산의 인근 사립고교에 근무할 때 퇴학했던 학생들이 보낸 편지를 떠올리면서 쓴 '퇴학생'이란 제목의 글의 한 토막을 보자.

"'PS. 다음에 우리 친구들한테 저가 편지했다고 말하지 마이소! 괜히 의리 상합니더. 친구들 끼리.' PS가 좋았다. 같이 따라 나섰던 자퇴한 호야도 편지를 보내 왔다. 역시나 호야의 후렴도 출이의 추신문과 비슷했다. PS가 다들 좋았다. 출이는 현재 통신회사의 간부로, 호야는 모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일한다. 철이는 사건 이후로 전학을 갔다. 아직도 철이 덜 들어도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이내길 교장은 교원노조의 갈등 속에서 교사의 길을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 한때 '사쿠라'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고 하면서, 전교조 교사 해직사태 뒤 일화를 소개해 놓았다.

"해직 교사도 생활인이다. 온갖 궂은 일을 다 해낸다. 뜻 있는 동료들이 거두는 후원금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먹고 살아야 하는 방편으로 생선 장수를 하기도 한다. 해직교사가 굴비를 팔러 왔다. 줄줄이 엮인 조기의 모습이 해직 선생 신세인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직업 아닌 직업으로 주이를 일깨워주는 것 같다. 얼마를 그렇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선생이 굴비 장수를 하니 굴욕적인 삶을 마다하지 않는 자체가 용기있어 보인다."

2000년 효암고 교장 임명, '즐거운 학교 만들기' 앞장

그는 2000년 공채로 양산시 웅상읍에 있는 효암고 교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이 학교는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즐거운 학교 만들기'로 교육계 안팎 잘 알려져 있다. 이 학교는 아침 등교 시간에 교문 앞에 '통제가 중심인 생활지도' 대신에 '학급회의 활성화' '인사 잘하기' ‘실내화 착용' '금연' 등의 학교 생활수칙을 피켓에 써서 들고 서있는 캠페인을 벌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100석 규모의 열람실은 학생회가 운영하는데, 성적순이 아니라 선착순으로 자리를 배정한다. 자리를 받은 학생은 자신의 열람실 이용시간을 학생회에 미리 알리고, 그 시간에 3번 이상 자리를 비우면 퇴출이고, 빈 자리는 다음 순번에게 돌아간다.

교사들도 지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금연교육인데, 학교에서는 흡연 3회 적발시 '퇴학'이라는 교칙을 만들어 놓았다. 너무 심하다고 할수도 있지만, 흡연금지는 학생들만 해당된 게 아니라 교장·교감을 비롯한 교직원 누구에게도 적용된다. 60명인 교직원이 금연을 결의하고, 그 덕분에 흡연 교직원이 절반 가량에서 대여섯명으로 줄었다. 아직 이 규정으로 퇴학당한 학생은 없다.

이내길 교장은 '쓴 맛이 사는 맛'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답 없는 답을 향해 길을 간다. 이 길을 갈이거나 저 길을 갈이거나. 돌아올 길이라면 가지를 말고 선택한 길이라면 되돌아보지 말자. 인생에 답 있던가. 가르침에 답 있던가. 그 글이 내 길인 양 그냥. 그냥 가보는 거지 뭐. 학교의 행색은 허름하고 볼품없지만 숲 가꾸기 학교로 나무들이 많다.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되고 숲은 모자람을 덮어 준다. 숲 속에서 자율과 깨우침을 강조하며 마음은 점점 부자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 기분이야말로 쓴 맛이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

그의 후배인 이용학 교사는 '빗장글'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았다.

"몇해전부터 '나는 지금 죽어도 호상이다'는 말씀 자주 듣습니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후회없이 살고 있다는 자랑으로 들릴 때도 있어 약 오르기도 하지만, 어쨌든 형님의 호상에 동의합니다. 언제고 멀리 가시는 날, 형님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 상청 가득 둘러앉아 호상이라고 입 모아 확인해 드리지요.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제자들, 말만 많고 게으른 후배들, 잔소리 더 필요하겠지요? …그러고 나서 천천히 가시면 정말 호상이라고 박수치겠습니다"라고.

이내길 교장의 제자들이 오는 24일 저녁 효암고 강당에서 '쓴 맛이 사는 맛! 이 맛에 한잔 하는 날'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연다.

쓴맛이 사는 맛 -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

채현국.정운현 지음, 비아북(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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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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