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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표지
ⓒ 랜덤하우스중앙
기관차 미카가 어른되어 돌아오다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는 '증기기관차 미카'라는 동화가 짧게 실려 있다. 이제 5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들은 묻는다. "그게 책에 나왔어요?"

하지만 이 동화의 작가를 기억하는 어른들은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유명한 시인 안도현이 쓴 동화다.' 안도현은 흔히들 연애시인이라고 한다. 그가 내뱉는 언어는 이를테면 사랑이야기다. 너무도 비밀스러워서 남몰래 간직하고픈 사랑 얘기들을 그는 솔직하게도 잘 쓴다.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 '목련' 부분


필자는 여자여서 잘 모르지만 가끔 이런 구절을 읽을 때면 남자도 참 순수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깊고 깊은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을 배경으로 비둘기와 닮은 하얀 새가 지붕 위에 앉아 있다. 새는 유성과 같이 자체발광을 한다. 바로 안도현의 시화선집(詩畵選集)인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2006)의 표지이다.

그림은 너무도 유명한 박남철이 그렸단다. 박남철과 필자는 약간의 친분이 있는 관계다. 그는 물론 필자를 알지 못하지만, 필자는 이미 5년 전에 그의 몇 권의 시집을 읽고 또 읽으며 관련 문헌까지 힘들게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해체시로는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권위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정말 시인 박남철이 그림을 그렸을까? 불행히도 그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화가로 현재 계명대에서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를 읽는 중간 중간 지루하지 않도록 시와 어울리는 신비하고도 예쁜 빛깔의 그림들이 서른 점이나 시집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시집이 가지는 다른 매력이다.

너와 나, 우리의 사랑은 수많은 희망을 간직한다

시집은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2부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 3부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4부 빗소리만큼만 사랑하는 게다, 5부 식구들 밥 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시인의 관심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사랑 →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 → 잠들지 않는 자신 → 사랑의 본질 → 가정속의 사랑으로 선회한다. 그의 시는 사랑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나나, 사랑 속에서 희망을 찾길 원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말해주는 거야

- '꽃' 부분


사랑한다면, '햇빛'과 '바람'도 견디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도 마음을 터줄 줄 알아야 한다. 시린 감정까지도 사랑의 뜨거움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아픈 마음을 쉽게 쏟아내기도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전문


마음껏 타고나서 재가 되어 이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하찮은 것에도 그의 사랑은 존재한다. 새까만 연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온기를 얻기 위해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루고 하얗게 재가 되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발을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속물근성에 젖은 현대인은 그의 이 한 마디로 인해 오늘도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짧을수록 거친 말을 한다

한 줄로 펼쳐 놓으면 시가 될 것 같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많은 말이 돌아올 것만 같은 짧은 시가 그의 시집을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잔인하게도 짓누른다.

그대 나를 떠난 뒤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여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그대 나를 떠난 뒤에도 / 떠나지 않은 사람이여'.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그토록 잔인하게도 사랑을 남겨둔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한 사람, 그는 나의 '옛사랑'이다.

혹자는 이렇게 짧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짧을수록 시가 가지는 함축미는 더 많은 수사법을 착안하는 것에 있다. '나를 떠난 뒤에도 / 떠나지 않은 사람'은 결국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제목에서 말하는바, '희미한 옛사랑'이다. 그는 결국 떠난 사람인 것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만이 아닌, 제목과 텍스트가 하나의 텍스트를 형성하여 역설(逆說)을 착안한다는 것은 안도현의 시에서만 가능하다.

시인 안도현은 젊은 시절 국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어둠이 온 세상을 잠식하고 있을 때, 그래도 잠들지 않은 것은 자신과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기차라고 말하는 시인을 통해 매서운 취업난으로 마음고생이 심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자신도 잠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힘을 낼 것이다.

그의 시가 마음을 잠식하는 한 그는 이미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들지 않는 것은 나와 젊음뿐이므로 오늘도 우리의 하루는 멈추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대구산업정보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와 도서관 웹진 LIBNEWS '책마을'코너 등에도 실렸습니다.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 안도현 시화선집

안도현 지음, 박남철 그림, 랜덤하우스코리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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