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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문화사랑방'에 모인 아이들이 떠들고 있다. 책상 위에는 두툼한 종이와 우윳곽을 오린 것, 색종이, 싸인펜 따위가 놓여있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을까. 아이들은 조커에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자기네들 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며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지난주에 우리는 <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를 읽었다.

ⓒ 한미숙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해 한다. 책에 나오는 위베르 노엘 선생님의 첫 인상은 아이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젊고 잘 생기고 운동 잘 하는 선생님을 기대하던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겁에 질렸다.

나이도 많고 주름투성이에 흰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선생님은 코 끝에 조그만 안경이 걸쳐 있고, 배가 공처럼 부풀어 오른 뚱뚱한 아저씨였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너희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였다. 그 선물은 조커만 들어있는 카드 한 벌이었다.

조커는 놀이에서 어려움에 빠졌을 때 쓰는 카드이다. 선생님이 선물로 준 조커를 읽고 아이들은 흥분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던 것일까?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숙제한 것을 잃어버릴 때 쓰는 조커, 벌을 받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수업시간에 군것질할 때 쓰는 조커, 교과서를 빼먹고 안 가져 올 때 쓰는 조커…'

노엘 선생님네 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커가 필요없게 되었다. 아이들에겐 '수업을 듣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가 필요없었다.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아이들에겐 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도 필요없었다. 학교에 너무나도 가고 싶었으니까.

노엘선생님이 조커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은 무엇일까? 조커는 무작정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주어진 기회를 딱 한 번 이용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는 것, 조커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활과 이웃을 돌아보게 하는 여유와 힘을 갖게 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니 조커를 사용하면서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노엘 선생님'은 '자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를 쓰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 후에도 자신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여유를 갖는다.

아이들은 선물로 받은 조커를 사용하면서 노엘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다. 그건 창의롭고 자유로운 교육으로, 그동안 아이들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노엘 선생님은 무조건 성적을 강요하거나 실적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런 선생님 자신만의 교육 방법이 아이들에게 값진 '선물'이 되었다.

ⓒ 한미숙
"우리도 조커 만들어요?"
"다음 시간에 준비물이 뭐가 필요한지 말해 주세요!"
"조커를 몇장 만들거에요?"

책을 다 읽고 난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그렇잖아도 조커를 만들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한테 먼저 얘기가 나왔다.

"조커 세 장은 실제로 써 먹을 수 있게 만들거야. 한 장은 내가 나한테 주는 조커, 또 한 장은 너희들이 선생님한테 줄 조커, 그리고 또 한 장은 부모님께 드리는 조커."

저마다 생각해 온 내용을 적어 조커카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뭘 쓸까,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아이들은 다시 책을 뒤적이기도 한다. 조커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얇은 밤색부직포에 초록빛 잎사귀를 붙여 자기만의 독특한 조커를 꾸미는 나영이, 손으로 가려가면서 다른 친구들이 절대 보면 안 된다고 하는 민지, 이건 아주 엽기적인 내용이라 혹시 보다가 기절할 지도 모른다며 비밀조커를 만드는 용이….

나도 아이들 옆에서 조커카드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만든 조커를 내가 한 개씩 받고, 내가 열 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가게 할 요량이었다. '5분 동안 놀다 들어오고 싶을 때 쓰는 카드' '웃기는 얘기를 하고 싶을 때 쓰는 카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을 때 쓰는 카드' '책 선물 받고 싶을 때 쓰는 카드' '친구랑 노래부르고 싶을 때 쓰는 카드' 이렇게 다섯가지 내용을 두 개씩 썼다.

▲ 조커 만들기
ⓒ 한미숙
'수업시간에 뛰어놀고 싶을 때 쓰는 조커' '도서책 안 가져왔을 때 쓰는 조커' '밖에 나가서 달리기를 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 '모두가 춤추고 싶을 때 쓰는 조커, 그런데 춤추지 않는 사람은 벌로 똥침을 줘야 한다는 조커' '선생님이 트로트곡으로 우리에게 노래해주고 싶을 때 쓰는 조커'.

아이들에게 받은 열 개의 조커가 모아졌다. 아이들과 나는 서로 주고 받은 조커를 다음주부터 7월 까지 모두 사용하기로 했다. 트로트노래가 은근히 걱정스럽긴 하지만.

수업이 끝났는데 유란이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밖으로 다 나가길 기다린 것 같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선생님…책 선물 받는 조커를 받았는데 정말로 책 선물을 하실 거에요?"”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입이 꽃처럼 벌어진다. 도서관 안팎이 꽃 천지다.

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 2단계

수지 모건스턴 지음, 김예령 옮김, 미레유 달랑세 그림, 문학과지성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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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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