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아침이슬> 악보
ⓒ 오마이뉴스 심규상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아침이슬>이 다시 거리의 노래로 부활하고 있다. 항쟁 당시 대표적인 거리의 애창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6월 항쟁 당시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 노래가 해금된 원인이 6월 항쟁임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아침이슬>은 1971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로 정권의 탄압을 받은 대표적인 노래다. 김민기의 첫 독립음반으로 발표됐지만 학생들에게 데모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그의 음반이 수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아침이슬>은 한동안 양희은의 노래로만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발표 4년 만인 1975년 이 노래마저 금지곡이 됐다. 사유는 애매모호한 '방송부적격'. 가사 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부분이 '붉은 태양'으로 해석돼 당시 북한의 김일석 주석을 지칭한다는 엉뚱한 해석이 뒤따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대학가에는 신군부에 맞선 이른바 '민중가요'가 등장한다.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른 <투사의 노래>를 비롯, 운동권에서 작곡된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민중가요는 <아침이슬>과 함께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노래였다.

<아침이슬>이 해금된 때는 87년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6.29선언' 직후다. 그 해 8월 문화공보부의 <가요금지곡 해금지침>에 따라 <동백 아가씨> 등 다른 185곡과 함께 해제됐다. 6월 항쟁 당시 수천만명이 금지곡을 불렀던 셈이다.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이 노래는 해금되지 않았을까? 대답을 하자면 적어도 87년에는 해금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87년 상반기 "시국변화에 따른 완화조치 없다"

이에 앞서 87년 상반기 한국공연윤리위는 가요심의 자료를 통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시국선언이 연이어 있는 시점이라고 해서 김민기씨의 작곡물이나 작곡가 자신에게의 대우 등에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시국의 변화는 그분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시국변화에 따른 기준의 변화란 있을 수 없으며 더욱이 '완화'라는 낱말은 고려해 볼 여지조차 없는 일이다."

하지만 6월 항쟁을 겪은 당시 민정당은 당정책위 문공분과 위원회를 열어 금지가요에 대한 전면 재심사 대책을 마련했고 뒤이어 해금조치가 뒤따랐다.

음악평론가인 대전신학원 음악원 문옥배(44) 교수는 '한국금지곡의 사회사'를 통해 "당시 가요금지곡 해제는 12년 만에 취해진 한국 가요사의 대사건"이라며 "이는 6월 항쟁 등 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의식한 정부의 정치적 조치였다"고 밝혔다.

간추린 '한국 금지곡의 사회사'
노래 검열, 일제강점기부터 100년간 지속

▲ 문옥배 교수가 쓴 <한국 금지곡의 사회사>(예솔, 2005)
ⓒ심규상
한국 역사에서 검열을 통한 음악의 통제는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다. 시작을 따지자면 노래책이 규제 검열당하는 <출판법>이 공포된 1909년이다.

일제는 36년간 1만여개의 법률 칙령 제령 부령들을 통해 노래책, 음악공연, 레코드, 노래교육 심지어 찬송가까지 통제했다. 다른 한편 가요정화 운동 등을 통해 일제 체제를 찬양 고무하는 내용의 노래로 대체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월북한 작가의 작품에 금지곡 딱지가 붙는다. 1957년 공보실에서 건전가요 보급을 이유로 '음악방송위원회'가 구성되고 대중가요 심의제도가 처음 도입된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통제는 크게 방송사 심의와 사전심의제라는 두 축에 의해 이뤄진다. 1965년에 '한국방송윤리위원회'가 가요자문위를 설치하고 음악방송에 대한 광범위한 심의를 벌이기 시작한다. 19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가 창립돼 노래 등에 대한 또 다른 심의를 벌인다. 1967년에는 '음반법'이 제정공포되고 이 법에 따라 108곡의 가요가 금지된다.

197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가 해체되는 대신 '한국공연윤리위'가 발족되고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가 시작된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공연활동 정화대책'이 발표되고 국내외 대중가요 222곡이 금지곡으로 선정된다. 당시 통제기준은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의 주장, 퇴폐성 등으로 흘러간 노래까지 검열 대상이 됐다. 다른 한편 일제시대 가요정화운동을 본 딴 건전가요운동을 전개한다. '충무공의 노래' '새마을노래' 등이 그 예.

1980년 신군부 등장과 함께 '방송윤리위원회'가 '방송심의위'로 명칭이 바뀐다. 반면 군부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의 노래' 등 저항가요가 자리매김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문화공보부의 '가요금지곡 해금지침'에 따라 국내 금지곡 382곡 중 186곡이 해금된다. 1988년에는 일부 월북음악가 작품도 규제에서 풀려난다. 같은 해 방송금지곡도 499곡이 해제된다. 1994년 탈냉전 등 시대적 변화에 힘입어 783곡이 추가 해금된다.

1990년대 들어서 정태춘이 음반 '아 대한민국'의 제작으로 '사전심의제' 논쟁이 촉발되고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이 제도가 폐지된다. 서태지와 이이들의 '시대유감'도 심의제 폐지에 한몫했다. 방송위에서 시행하던 음악방송은 자율심의로 이관된다. 공연윤리위도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다시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개편돼 현재에 이른다. 즉 5·16 이후 노래 검열과 규제의 틀이 됐던 두 축이 폐지된 것.

(위 내용은 <한국 금지곡의 사회사>(예솔, 2005)를 정리한 것입니다.)

태그:#아침이슬, #6월항쟁, #금지곡, #김민기, #양희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