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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yes24
우리에게 민족심은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것이 하나로 똘똘 뭉치게도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배타심을 줄 때도 있다. 국가적인 대외경쟁에서 승리하면 명성을 함께 누리지만 그 반대되는 일도 많다. 그로 인해 대외적인 험담은 물론이요, 우리나라 사람끼리도 서로 옥신각신한다.

도대체 그 민족주의는 언제 형성된 것일까?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 이야기>를 통해 일제 시대의 식민정치를 받으면서 태동된 것이라 한다. 이전의 단군이나 주몽과 같은 시대는 고사하고 조선시대에도 그런 자긍심은 꿈틀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해석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재해석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제가 <인식>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제시된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비판과 그 바탕을 이루는 민족주의 역사의식만큼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27쪽)

이 책을 통해 그가 밝히려는 역사적 실체는 무엇인가? 조선왕조가 진정으로 패망한 원인, 식민지 수탈론의 허점, 친일협력자에 무조건적 비판에 대한 재평가, 일본군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의 실체, 민족분단을 부추긴 한국전쟁의 주창자에 대한 재인식, ‘나라세우기’의 관점으로 바라본 이승만 대통령의 실사구시적인 평가 등, 이른바 민족정서에 저촉될지 모르는 민감한 사안들을 그는 피하지 않고 다루고 있다.

우선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18세기 토지개간을 위한 환경파괴 때문이라는 것. 이른바 산을 벗겨낸 까닭에 홍수로 인하여 농작물 피해가 극심했고, 당연히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이 봉기를 했는데, 그에 대한 조정의 통합능력이 허술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의 정치 원리로서, 이른바 중화제국의 국제질서로 인하여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은 중국의 책봉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러한 중국의 질서가 흔들리면서 그것을 대체할만한 국제 감각을 지닌 창조적인 지성이 우리나라에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수탈론의 허점을 이야기하면서 참신한 관점도 제시한다. 이른바 일제시대에도 우리나라의 경제는 성장했는데, 2-3%의 소수에 불과한 일본인도 배를 불렸지만, 조선인들도 대부분 배를 불리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된 까닭은 사유제와 계약적 자유를 인정한 서유럽의 문명에 기초한 일본의 민법이 우리나라에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민법은 단순히 수탈만 감행해 민심을 잃는 것이 아닌 조선 지배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35년간의 프로젝트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식민지 시대에서 계승한 바람직한 유산도 없지 않는데, 이른바 근대적인 법과 제도, 그리고 시장경제체계가 그것이란다. 더욱이 높은 교육 수준의 인적 자본도 중요한 유산으로 손꼽고 있다. 그에 대해 북한은 그것들을 모두 폐기처분한 까닭에 남한보다 훨씬 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저는 60년도 더 된 심지어 100년도 더 된 과거사를 법률로 정치적으로 청산한다는 것의 부당함을 계속 주장하였지요. 과거에 벌어진 어떤 범죄적 사건과 관련하여 겉으로 드러난 소수의 몇 사람을, 이미 죽어서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는 그들을, 그 사건과 관련된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일종의 편 가르기 방식으로,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정당한 방식의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는 것이 제 주장의 요지였습니다.”(163쪽)

이는 현재 벌이고 있는 과거사 청산에 대한 부당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왜 그와 같은 주장이 타당하다고 밝히는 것일까? 오늘날 국가적인 관심사로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이 과연 잘못 행하고 있는 일인가? 그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광수와 같이 전시기에 징병 징용에 적극 협력한, 그야말로 정신마저 일본식으로 되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당시 하급직 관리로서 조합원, 은행원, 회사원, 그 밖에 의사와 법률가 등 근대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소극적 차원의 대일협력자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친일파로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까닭에 건국 초창기 때와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이 1945년에 거론한 친일파 성명발표는 일견 타당하다고 밝힌다. 그것은 왜정 때 고등관을 지낸 사람이라도 건국 사업에 참여하여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면 이미 그는 친일파가 아니고, 친일 사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본말을 자주 올리고 일본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청산될 친일파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미래지향적인 정신적 친일청산을 주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영훈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가 제기한 한국전쟁의 내전설도 설득력이 없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토지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인 민주노선과 소수의 보수적인 지주계급 간의 갈등국면이 1946년 대구 폭동과 1949년 제주도와 여수 순천의 반란 등으로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농지개혁은 완료한 상태였고, 38선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도 1949년 8월까지의 일이고, 스탈린도 그런 충돌을 금하라는 엄명을 내린 바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이 남침을 하도록 미국이 덫을 놓았다는 유인설도 무익한 가설이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30년대의 악몽과도 같은 공황이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은 또 하나의 전쟁 특수를 위해 남한에서 미군을 일부러 철수시켰고, 그로 인해 군사적 공백 상태를 조장하여 북한군이 남침하도록 유인했다지만, 결코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오히려 한국전쟁의 실체는 소련과 중공의 무시무시한 국제음모로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 회담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표명했지만, 38선은 소련과 미국이 합의해서 그은 국제적 성격의 분할선임을 상기시키면서 스탈린은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한 것은 1950년 1월 30일인데, 그 10개월 사이에 국제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1949년 8월 주한 미군이 철수했고, 같은 해 10월에 중국의 내전에 승리한 모택동과 스탈린이 1950년 1월 22일에 우호동맹을 맺게 되고, 결국 그 동맹으로 인하여 김일성은 다시금 남침 계획을 스탈린에게 승인받는데, 스탈린은 가히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흡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은 얼핏 보아 좋은 것 같지만 때론 큰 파장을 몰고 오기도 한다. 그것이 정치적 국가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되면 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영훈 교수는 민족주의를 부추긴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단위가 민족단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개별 인간사의 장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자유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이 상호 협동과 경쟁을 통해 신뢰와 법치와 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까닭에 개별인간사의 역사적 관점으로 지나온 민족주의 역사관의 허점을 되짚어 보려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를 아우르는 진정한 관점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기파랑(기파랑에크리)(2007)


태그:#대한민국 이야기, #이영훈, #해전사, #이승만,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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