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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세움 측면
ⓒ 한길사
굳이 그 많은 분량의 책을 뭐하러 읽었는지에 대한 동기를 말하라고 한다면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도 갈망도 아닌 단지 고대사회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그 발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크리스찬인 나로선 고대로마를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선결과제이기도 했다.

시작부터 나는 이 책에 대한 찬반양론에 휩싸였다. 쉽게 말해 무엇 때문에 제국주의의 향수에 가득 찬 일본 작가에게 인세를 주며 책을 사보냐는 것이었다. 차라리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고대 로마사를 보라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제국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아니 제국주의 밑에서 신음하던 뼈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비록 패색 짙은 시기에 태어났지만 제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의 입장에서 제국을 바라보고 싶었다. 또 나와는 다른 비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제국의 역사라는 것이 크게 와 닿았다. 수십 만 신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작가가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관점이 흥밋거리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의 관심은 로마 기독교에 모아졌다. 물론 지금의 개신교와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로마 가톨릭의 역사지만 말이다. 하지만 네로황제 시대를 비롯해 서기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정식으로 종교로 인정받기 전까지 공공연하게 탄압당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정식종교로 인정받았고 또 어떻게 하여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았는지는 이전부터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물론 작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로마 기독교의 역사지만, 작가의 생각 그 자체를 그대로 수용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믿는 나의 관점 그대로 바라볼 마음도 없다. 종교를 바라볼 때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그 이후 문제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앙에 의해 그 종교의 그릇된 면까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맹신이 될 수밖에 없다.

탄압 받던 기독교가 뻗어갈 수 있었던 이유

로마 기독교의 초기는 탄압과 저항의 역사였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다. 일신교 국가와 비교 할 때 단지 신의 숫자가 하나이냐, 다수냐 하는 숫자의 논리를 벗어난다. 다신교의 특징 중 하나는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인간에게 어떠한 규례도 구속도 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세계에 동화되어 인간과 함께 하는 세속적인 신이다.

어떤 신을 믿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신들 중 최고의 신이 존재하지만 반드시 최고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반면 일신교의 신은 다르다. 일신교의 신은 인간에게 경전을 통한 분명한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

또 유일신 이외의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일신 이외의 신은 모두 잡신, 악신으로 분류된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유대민족이 로마에 점령된 것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유대정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 66년부터 시작되어 서기 73년에 마사다 함락으로 끝난 유대 전쟁으로 사실상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하지만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부터 유대민족은 로마에 저항한 민족이었다. 유대민족은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에도 점복당한 채 순순히 로마법을 따르는 민족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이 믿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심 때문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로마에 협력하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배교가 되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정복한 속주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정복한 민족 그 자체의 문화와 삶을 최대한 인정해주는 관용정책이 속주에 대한 기본정책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로마제국에 반항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로마는 유대민족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고 그들의 성전에 봉납을 허락하는 등 유대교의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왜 그토록 로마에 저항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위에서 말한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점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실상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던 기독교가 동방의 대도시를 비롯하여 수도 로마에까지 암암리에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유일신사상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신앙을 가진다면 상관없는 다신교와는 달리 신앙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라도 바쳐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의 특성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 그들에 대한 탄압은 그 종교를 눌러버리기 보단 오히려 그들의 신앙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황제마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만들어버린 '기독교'

▲ 늑대상
ⓒ 한길사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기독교는 제국 전역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재했다. 네로황제 시대를 시작으로 더욱 본격화된 기독교 탄압은 황제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탄압의 역사는 되풀이 되었다. 유대교에 뿌리를 둔다고는 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는 아주 다르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부정했으며 기독교도에게 있어 유대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대죄인들로 분류되었다.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폐쇄적인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피부색이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였다. 기독교 공동체는 제국의 서방에서는 수도 로마에 집중되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제국의 동방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제국 동방의 도시에 집중되었다.

이제는 수도 로마의 궁중에도 기독교도들의 세력이 뻗게 된 것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은 단지 기독교를 다른 로마의 종교처럼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실상이 어떠하든 칙령 자체의 내용은 그러하였다.

대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와서는 좀더 노골적으로 로마의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건국초기부터 수백 년을 이어온 로마의 전통종교는 차별에 이어 탄압당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서기 384년 테오도시우스황제 시대에 원로원 회의장에서 승리의 여신상이 철거된 것은 이교가 존재하는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제방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본격적인 반이교 반이단 노선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시기에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이교 배척이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조각상들이 파괴되었다.

일신교에서 유일신 이외의 것들은 모두 잡신이 된다. 이러한 잡신들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들이 우상으로 치부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000년 가까이 로마인들이 최고신으로 경배해온 유피테르에게,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원로원으로부터 유죄가 선고 되었다. 이시기에 와서는 로마의 국교는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된 것이다.

원로원으로부터의 유죄선언은 원로원의 기독교화를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에게 무너진 원로원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이전 제정시대 이후에도 로마를 이끄는 정신적 지주는 원로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원로원이 기독교 교회의 뜻에 따라 전통종교의 최고신을 유죄 선고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기독교화는 단지 국가의 종교가 기독교가 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례를 받은 로마의 황제 또한 단지 하나님의 어린양에 불과했다. 모든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고 있는 기독교이기에 로마의 황제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부여 받은 자에 불과했다.

단적인 예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민중폭동에 대한 과도한 진압에 대해 당시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과도한 처사에 대한 속죄를 요구하였고 거기에 저항하던 로마황제는 결국 교회로부터의 파문에 굴복해 속죄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의 '카노사의 굴욕'과 비슷한 경우였다. 카노사의 굴욕은 서기 1077년 이탈리아 중부의 카노사성에 체재 중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신성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눈 속에 서 있었던 일이다.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조차 교회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둘 다 세속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며 마치 중세시대의 왕권신수설과도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시오노 나나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임종직전까지 세례 받는 것을 미룬 이유를 설명하였다. 세례를 받는 순간 로마의 황제일지라도 기독교 주교에 의해 제제를 당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물론 이 또한 하나의 가설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서의 세속의 권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이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해 그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공인화 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지만 말이다.

십자군전쟁 이후 더욱 본격화 된 이도교 배척

▲ 클라우디아 수도교
ⓒ 한길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칙령이 공표화 될 때 즈음하여 로마는 현재의 이스탄불,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명명된 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본격적인 기독교화된 동로마 제국의 건설이었다. 얼마 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로부터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형식적으로 나마 로마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로마가 중세유럽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거대한 제국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이 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가 공인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이교도 배척은 중세의 십자군전쟁을 거쳐 더욱 본격화 되었다.

현재의 미국과 이라크전이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 불려질 만큼 과거와 현재에도 종교성에 기인한 국제적 분쟁은 끝이 없었다. 초창기 십자군원정을 제외한 제2차, 3차의 십자군원정은 애초 종교전쟁이라는 명분을 넘어 단지 살육과 약탈의 기록밖에 남아 있지 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말했다.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로마로부터 정식 종교로 인정받기 이전 초창기 기독교는 단지 그들이 신의아들로 섬기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의 순수성을 넘어 기득권세력의 세속적 이해관계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차차 그들이 섬기는 유일신은 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주는 수단에 불과해 졌고 결국 신은 어디에도 남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권력욕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실제로 로마로부터 정식종교로 인정받은 직후 늘어난 신자의 대다수는 믿음 그 자체 보다는 기독교를 섬김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이권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라고 역사적 사료는 말하고 있다.

잇속 챙기기 위한 세속적 수단으로 전락한 '종교'

현세의 기독교가 지탄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순수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목적으로 혹은 특정 집단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종교가 이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회자체의 순수한 종교적 의미보단 특정교회의 권력을 위해 세력을 키우고 그것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득을 챙김으로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경우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몇몇 소수의 패역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적인 부분들이 기독교에 대한 순수한 믿음 하나로 신앙을 이어가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얼마나 그릇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사실 교회의 부정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일부 부조리를 전체로 확대 해석하여 기독교 전체를 부도덕한 종교집단으로 보려드는 경향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성을 타인에게서 발견한 후 타인의 그것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죄성을 덮어두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는 공공연하게 대다수의 순수한 신앙을 가진 민중을 앞세워 일부 권력층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얼룩지어졌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숱한 종교적 분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종교를 위시하여 저지른 성상파괴운동도 타종교 배척의 역사도, 유일신 사상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의 특성이라 백보 양보한다 할지라도 교회가 그 본연의 순수 그 자체를 넘어 특정 집단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세속적 수단에 불과하다면 과연 기독교의 유일신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할지….

결국 우행을 저지르는 건 신을 앞세워 세속의 이득을 챙기려는 인간 본연의 죄성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정작 기독교의 유일신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데도 말이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이야기, #로마, #기독교,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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