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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대한민국 정치판이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대통합을 외치며 여러 예비 대선후보들이 공방을 벌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검증을 이야기하며 후보 간 비방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이는 과연 누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결국 이는 지도자가 어떠한 덕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의 대립이다.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에 대하여서 사람들끼리 직접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으나, 이에 대해서는 정치 이념에 따라, 지지하는 정당 혹은 후보에 따라 견해가 극명하게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논쟁으로 흘러가 버릴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서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의 지도자들을 논하면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된 로마의 이야기다. 로마는 오늘날 많은 중소국으로 나뉠 정도로 다민족 문화권이었던 영역을 오랜 세월 동안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운명공동체로 발전, 번영시키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런 국가 지도자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virtue)을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로마의 긴 역사 동안에는 많은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로물루스를 시작으로 하여 콘스탄티누스까지, 많은 지도자들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 시도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때로는 100년 이상이 지속되는 위대한 업적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우책(愚策)으로 평가받으며 단 10년도 지속되지 못하곤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과연 지도자의 덕목으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로마 지도자들에 대한 분석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입장을 참고하여 과연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집단에 대한 일상적 혹은 비상적 상황에서의 통제력 및 통치력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의 우두머리가 그 구성원들에 대하여 통제하지 못한다거나 그 집단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통치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지도자는 곧 실각하고 만다는 것이 로마 역사에 있어서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 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인 안토니우스와, 그와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다며 도나우 군단을 통솔했던 군단장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다. 먼저 삼두 중 한명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잔당을 토벌하러 본국 이탈리아를 비운 기간 동안의 통치를 맡았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카이사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이탈리아 본국 내의 동지들의 과격한 주장을 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카이사르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폼페이우스의 집을 몰수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을 저질렀다. 결국 카이사르가 죽은 뒤의 내전에서 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게 된 원인도 로마 동방에 대한 통치에 있어서 클레오파트라의 간섭을 용인함으로 인해(클레오파트라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지 못하고) 많은 동맹국들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이것이 그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효과로 이어진 데에 있다. 결국 통치력·통제력의 결여로 인해 그는 패하게 된 것이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역시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에는 그 공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부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결국 이는 무키아누스가 그를 중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좌천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즉, 지도자가 자신의 집단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 집단을 통치하지 못한다면 이는 지도자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에게는 이런 통치력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뛰어난 통찰력과 지성이 필요하다. 지도자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지도자의 통치는 그 집단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아테네의 솔론,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가 행한 통치가 바로 그 예이다. 아테네의 솔론이 만들어낸 민주정치와, 리쿠르고스가 개혁한 스파르타의 모습이 이후 이 두 도시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지도자에게는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즉 보다 더 부유하게, 보다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도자 부적격으로 판단되는 자는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이다. 제정 말기에 그가 행한 일련의 개혁은 오직 야만족의 침입을 막고 정치를 안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그 결과는 이른바 '4인 황제' 체제이다. 이 체제는 앞서 말한 두 목적, 즉 야만족의 침입 방지와 정치 안정화라는 두 가지 목적은 달성했다. 그러나 그가 무리하게 행한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가속화되어 로마 경제는 피폐해졌고 이른바 중산층이 붕괴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로마군을 무리하게 증강하려는 시도 때문에 로마 군사력의 질적 저하를 초래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해가 되었다. 이는 그의 통찰력과 지성이 결여되었다는 증거이다. 그가 진정한 통찰력과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과연 자신의 개혁이 자신이 속한 집단, 로마 제국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판단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도자의 통치에 있어서의 통찰력과 지성의 결여는 결국 그 집단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세 번째 자질은 지구력·지속적인 의지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정책이 옳다고 판단될 경우 그 결과가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정책을 수행해야만 한다. 국가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것은 당장의 악평에 좌지우지되어 지도자가 자신의 정책 기조를 뒤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비록 카프리 섬에 은둔하기는 했으나 제국의 안정화를 위해 그 어떠한 악평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으며 이는 후임 황제들에게 계승되었다. 오현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제국 순행이 결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자신의 평판을 올리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이를 멈추지 않았다. 반면에 오현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전임자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이 악평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해외 순방을 전면적으로 중단해 버렸고, 문제의식의 중단으로 인한 피해는 모두 후임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의 중단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 13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된 원인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도자에게 이른바 '뚝심'이 없다면, 설령 전임자의 정책이 악평을 받았을지라도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면 결국 그 집단에는 불이익이 돌아가고 만다.

로마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지도자의 또 다른 자질은, 바로 선견지명이다. 선견지명은 지성이나 통찰력과는 다른 요소이다. 통찰력이 부족하다면 미래를 올바로 내다볼 수 없겠지만 통찰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견지명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로마사에는 흔치 않게 등장한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술라이다. 술라가 행한 각종의 개혁은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고, 이런 개혁으로 인해 이런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동안은 원로원의 통치력이 회복되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어느 정도의 통찰력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의 현실은 그의 개혁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쪽이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원로원의 통치력 결여는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설립한 제정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선견지명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 집단의 자원을 낭비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그 집단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도자는 선견지명을 갖추어서 집단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만으로는 그 지도자의 통치가 성공할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도자의 통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통치가 시대의 요청에 부합해야 한다. 지나친 선도자나, 이른바 '뒷북'치는 지도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인들이 결국 그들이 세운 이정표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통찰력·지성·선견지명을 갖추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선도자였다. 그들이 꿰뚫어본 원로원의 통치능력 결여는 아직 잠재현상에 불과했다. 그들의 개혁은 시대의 흐름을 한 단계 앞서간 것이었기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스틸리코 역시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지 못한 지도자이다. 그의 자질은 로마의 ‘황금 세기’에는 어울리는 자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멸망하는 로마, 즉 ‘환관 정치’로 대표되는 오리엔트화(化)된 로마 제국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자질이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환관의 계략으로 인해 몰락한 것이다. 지도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는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부터 두려움과 존중을 받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 지도자는 자신의 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고, 결국 이는 집단 구성원들로부터 두려움과 존중을 받아서 집단 구성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카이사르를 관찰했을 때 극명히 드러난다. 카이사르가 내건 ‘관용’은 마키아벨리가 말했던 ‘군주는 두려움을 받는 것이 낫다’라는 주장에 완전히 대립된다. 카이사르는 술라의 방식, 즉 적을 말살하는 방식은 로마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관용을 주장했을 것이며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공화주의자들에게 간단한 충성서약만을 요구하며 공직에 복귀시킨 것은 지나친 관용이었다. 그가 그들을 살려주고 싶었다면, 카탈리나 사건 때에서 주장한 것처럼 그들을 지방에 감금하고 관찰하는 방법으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가 행한 관용은 공화주의자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암살되고 말았다. 그의 통치는 제정 로마의 기틀을 완벽하게 마련하지도 못하고 끝난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그의 통치가 계승되었으나, 만약 이후 원로원파가 득세하고 그의 통치방향에 반대되는 인물이 등장하였다면 그의 통치는 결국 무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그가 만약 술라처럼 두려움을 받았다면, 적어도 아우구스투스처럼 권위에 있어서 압도적이었다면 그가 암살되었을까? 지도자는 자신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구성원들의 두려움과 존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회 전반의 분야에 대한 많은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첨예한 대립, 중산층의 붕괴와 빈부격차 증가, 각종 범죄의 발생빈도 증가, 윤리와 도덕의 붕괴 등 사회 내부의 문제들이 끊이지 않고, 한미FTA등 이른바 ‘글로벌화’ 역시 결코 가벼이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이는, 로마가 마치 한니발 전쟁 이후에 급격하게 확장된 영토에 걸맞지 않는 체제로 인한 혼미를 겪었듯이, 우리 사회가 60~80년대의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발전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의식 면에서 그 발전을 따라가지 못해서 혼미를 겪고 있다고 판단된다. 경제력은 발전했으나 의식의 발전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결국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혼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혼미가 그라쿠스 형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해소되었듯이, 우리의 혼미도 뛰어난 지도자를 통해서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지도자에 대한 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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