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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더 지난 케케묵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도 되는 건지, 더군다나 내 이야기도 아닌 남의 아픈 과거(?)인데, 그것을 발설하여 다시금 헤집는 꼴을 만들까봐 우려되는 맘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미리 양해와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보따리를 끌러 보겠다.

1980년대 초,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재수를 한 후 대학에 들어갔다며 1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 그동안은 친구들과의 사귐을 모두 끊고 공부에만 집중했다며 각고의 노력 끝에 본인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기어이 합격을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명문 사립대학이었다.

그 친구를 따라 그 대학의 친구들도 만나고, 축제도 따라가고 시험 때는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도 했다. 친구는 자기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라서 연습장 하나도 그 대학 마크가 찍힌 것을 사용하고, 노트와 교재도 대학 마크를 반드시 앞으로 보이게 해서 가슴에 꼭 안고 다녔다.

그때 나는 속으로 고등학교 때 중하위권 정도의 성적을 받았던 사람이 무섭게 노력을 하더니 저렇게 공부를 잘하게 되는구나 하며 감탄했다.

결혼도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잘 생긴 남자와 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느냐고? 도대체 결론이 뭐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실은 그 친구가 가짜 대학생이었던 것이다. 가짜는 원래 더 진짜 같은 법이라 함께 다니는 몇 년 동안 도무지 어떤 허술함도 노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쪽같이 속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아니, 그 친구는 사실 그 대학 학생이었다. 강의를 빠짐없이 듣고, 교수를 만나고, 과 학생들의 이름을 다 알고, 학교 행사에 참석하고 시험 때는 공부까지 열심히 했는데 학생으로서 그 이상 뭘 더 요구하란 말인가.

부모님조차도 자기 딸이 그 대학에 다니는 줄 알고 계신 터였다.

그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형수술로 대변신을 꾀한답시고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친구들이 더러 있기는 했다. 여기저기 깎고, 세우고, 빼느라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그 거야 한눈에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1년만에 '학력 세탁'을 해서 나타난 사람을 도대체 무슨 수로 척 보고 가려낼 수 있었으랴. 아무리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한들 '진짜 얘가 그 대학을 들어갔을까'하고 다짜고짜 의심부터하고 들 수야 없지 않은가 말인가.

어쨌든 친구의 가짜 대학생 노릇은 졸업 때를 앞두고서야 막을 내렸다.

남이 볼 때는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서울대 나온 남자를 '잡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나 싶기도 하다. 우리 나이의 여자들은 대부분 시집 잘 가기 위해 대학 간판을 땄던 때이기도 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그 친구가 연출하는 나날의 연기에 빠져서는 안 될 소도구이자 조연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진짜' 대학생, 그것도 이대생이었으니 그 친구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분 위조를 위해 그럴 듯한 '진품'을 옆에 세워두는 것이 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겠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다. 가짜 노릇 하느라 스스로 양심에 걸려 나를 만나면 늘 자기가 밥을 사려고 하고, 무조건 나한테 잘해줬음에도, 나로서는 그 친구를 만나는 동안 아무것도 손해 본 것이 없음에도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나이라면 '오죽했으면,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었으면, 그러는 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면서 내 쪽에서 그 친구의 맘을 먼저 헤아려 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때는 나도 충격이 너무 커서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았다.

이즈음에서 내 이야기를 좀 하자면, 아까도 잠깐 언급한 대로 나는 이화여대를 나왔다. 그 친구의 시선에서 보면 내가 참 부러웠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봐도 학력 컴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는 처지이다.

그런데 톡 까놓고 말해서 나는 '이대 간판'을 가지고도 소위 SKY 출신 남자와 결혼도 못했다. 졸업 무렵 전문 중매쟁이들이 학과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친구들의 명단을 추려갈 때도 나는 끼지 못했고, 그렇다고 미팅 등 자력으로 SKY 쪽 남자들을 꼬시지도 못했다.

누구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서울대 나온 남자를 남편으로 만드는데 나는 있는 능력(?)도 제대로 못 발휘했으니 계산이 흐린 등신이었다.

그렇다고 이대 졸업장을 가지고 그럴 듯한 직장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이제는 이민까지 와 버렸으니 호주 사회에서 내 학력을 물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본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영어를 이것밖에 못하냐는 소릴 들을까 봐, 언젠가 한번은 아이들 부모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걸로 말해 버린 경험도 있다. 사회 전체에 대졸자 비율이 30% 정도밖에 안되는 나라에서 영어도 못하면서 공연히 튀었다 간 왕따 당할라,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아서였다.

그것도 순전히 한국식 사고지만. 이 나라에서 학력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어서.

이대 나와봤댔자 건진 건 하나도 없이 말짱 '꽝'으로 사는 나에게 어느 날, 호주로 이민 와서 만난 친구 하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머, 자기 이대 나왔다며?"
"어…, 왜?"
"근데 왜 그렇게 겸손해? 전혀 이대 분위기 아니다. 같이 지내면서도 감쪽같이 몰랐네."

아니,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이대 나온 것 하고, 겸손한 것 하고 하등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말을 고깝게 해석하자면 역시나 '학벌 값도 못한다'고 들어야 하나.

하기사 나는 주변에 '학벌 후진 나보다 더 별 볼 일 없이 사는 너를 보니…'하는 대리 만족을 수시로 안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친구가 나를 그나마 좋게 봐서 '겸손하다'는 말로 표현해 준 건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학력 콤플렉스'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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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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