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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는 든든한 안내자를 만나야한다

 

2007년 10월 20일(토),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 첫날이다. 답사도 여행인데 즐거움이 없으랴. 하지만 많은 부담이 가는 여행이다. 답사여행은 무턱 떠날 수 없다. 사전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거기에는 답사지에 대한 공부도 필수적이다. 그야말로 “아는 것만큼 보는 것”이 답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지에 밝고 든든한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까운 시간을 길에서 다 소모하기 마련이고, 취재 인물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만나도 그들은 쉬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1999년, 2000년, 2004년 3차에 걸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그때마다 국내 항일유적지를 두고서 국외부터 더듬는 게 그 순서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곧 국내 항일유적지 답사를 시작하리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선뜻 발걸음을 옮겨 놓지 못한 것은, 답사에 따른 여러 가지 준비 부족에다, 무엇보다 열정이랄까 자신감이 부족했다.

 

이미 이태룡 선생의 <의병 찾아 가는 길>, 조동걸 선생의 <독립군 길 따라 대륙을 가다>라는 훌륭한 역사기행 책이 나와 있는 데, 나의 글이 그 아류작이 될 염려가 있을 것 같아 주저하던 중, 지난 여름 언론인으로 항일 문제에 일가를 이룬 정운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를 만나 이런 나의 고민을 말하자 “<백범일지>도 일백여 편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오랫동안 교단에 서셨던 박 선생님이야말로 개성있는 문체로 청소년들이 알기 쉽게 쓰실 수 있는 적격자”라고 용기를 한껏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중, 지난 9월 하순에 전남 담양 창평에 사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 장군의 후손이요, 구한말 호남의병 선봉장인 녹천 고광순 장군의 사손(祀孫;제사를 받드는 후손) 고영준 선생이 강원산골에 사는 나에게 안부 겸 초대가 왔다. 감히 청할 수 없지만 얼마나 바라던 바인가.

 

나는 호남의병전적지 답사계획을 말씀 드리고 앞장 서줄 것을 부탁드리자, 고 선생은 오히려 나의 계획에 찬사를 보내며 마침 딸딸이(승용차)도 새로 한 대 샀다면서 매우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래서 지난 10월 1일, 사전 답사로 호남으로 달려가 답사 계획을 세운 뒤 호남의병 연구대가인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를 찾아뵙고 호남의병 전적지에 대한 여러 자문과 후원도 약속받았다.

 

참 아름답고 기름진 들판

 

여행에 짐처럼 짐스러운 게 없지만 답사여행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필수품인 카메라, 지도, 녹음기, 참고 서류 등을 챙겨 넣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나서려는데 아침 기온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올 겨울 첫 추위라는 예보가 적중했다. 아내의 권유로 춘추복을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반코트까지 입고서 집을 나섰다. 안흥에서 횡성으로 다시 원주로 거기서 대전행 버스로 간 뒤 서대전에서 13시 19분 광주행 새마을호를 탔다.

 

열차가 출발하자 곧 차창 밖 풍경들이 펼쳐졌다. 나는 영남 태생으로 경부선은 눈을 감아도 환히 익지만 호남선은 여태 낯설다. 하지만 먹물든 이조차도 내 고장을 먼저 챙긴다면 얼마나 소인배일까.

 

온 들판에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한창 벼 추수기로 드문드문 콤바인이, 마치 지난날 중고등학생 머리를 바리캉이 지나듯이 벼논을 누비고 있었다. 불과 이삼 십년 전만해도 벼 베는 일꾼들로 온 들판이 사람으로 붐빌 텐데 이제는 그런 광경을 사진으로나 화면으로밖에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참 아름답고 기름진 들판이요, 예쁜 산들이다. 내 조국 산하가 바라볼수록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는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듣고 배우며 자랐지만, 그 말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엠파이어스테이트와 같은 초고층으로 마천루를 이룬 미국이나 영국의 타워브리지, 프랑스의 에펠탑을 동경하면서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이 넓은지 좁은지 모르고 산다. 나도 지난 60여 년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 남의 얘기만 듣고, 남이 사는 나라가 마냥 좋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최근 10여 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상하게도 다른 나라를 둘러볼수록 내 나라 한반도가 아기자기한 매우 아름답고,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나라도 개인도 이웃을 잘 둬야한다

 

최근 이런저런 일로 일본을 몇 차례 기행하고는 왜 걸핏하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정한론(征韓論; 고종 때. 당시 대원군의 강경한 배일ㆍ쇄국 정책으로 감정이 좋지 못한 일본 내 일부 지도층에 대두된 우리나라를 정복해야겠다는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2003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보름동안 일본 세토나이카이와 기타도호쿠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부산에서 서울행 열차를 타고 오는데 두 나라의 국토가 또렷이 견주어졌다. 일본의 산하를 보다가 내 조국 산하를 보니까 마치 보리밥을 먹다가 쌀밥을 먹는 듯, 새삼 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일본의 산하는 어딘가 거무튀튀했다. 거기다가 일본은 걸핏하면 지진이요, 태풍으로 애써 모아놓고 세워 둔 재화나 건물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다. 좁은 섬나라에 1억이 넘는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살기에는 어딘가 좁다. 더욱이 땅이 척박하여 먹을 거리도 부족하다. 일본에 정통한 방통대 이영 교수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일본이 선진국으로 부(富)를 누리고 있지만, 에도(江戶) 시대까지도 먹을 게 부족하여 자식이 많은 집에서는 똑똑한 자식은 거둬먹였지만 그렇지 못한 자식은 버렸다”고 할 만큼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난날 수시로 우리나라 삼남지방에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던 까닭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오랜 숙원인 드넓은 대륙 진출 꿈을 이루자면 반드시 반도인 우리나라를 교두보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의 마음속에는 예로부터 한반도를 꿀컥 삼키고 싶은 욕구가 늘 도사리고 있었다. 15세기 임진왜란이 그랬고, 지난 세기의 한일병탄이 그랬다. 일제는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 중국까지 삼켜 대동아공영을 꿈꾸다가 미국이 던진 원자폭탄 두 방에 밥통까지 내려간 한반도를 게워 놓았으니 지금도 그네들 마음속에는 얼마나 아쉬움이 많겠는가.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다시 한반도를 삼키려고 덤빌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일 것이다.

 

일본인들의 마음은 철저한 이중성으로, 강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고 약자에게는 매우 오만하다. 겉보기로는 매우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한 듯 보이지만, 우리의 국력이 약하기만 하면 그들은 금세 야수로 돌변한다. 미국인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에도 일본인들은 국화(우아함, 곧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잔인함, 곧 전쟁)을 숭상하는 민족으로,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잘 그리고 있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공격적이자 비공격적이며, 군국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용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리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맞이한다.  - 김윤식 외 옮김 을유문화사 발간  <국화와 칼> 8쪽
 

개인도 그렇지만 나라도 이웃을 잘 둬야한다. 양국간 서로 힘이 비슷할 때는 사이가 좋지만 조금만 기울면 상대를 넘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무리 조상이 위대한 유산을 남겨도 그  후손이 시원치 않으면 이민족에게 죄다 약탈당하기 마련이다. 아니 약탈당하기 전 내 손으로 이민족에게 팔아버리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이집트나 그리스의 유물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랑스나 영국인들이 약탈해 모은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 국보급 보물들도 일본이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숱하게 흩어져 있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열차는 광주역에 닿았다. 마중 나오기로 한 고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대합실에서 두리번거리는데 손전화가 울렸다. 고 선생이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차만 부서지고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애초의 계획은 광주역에서 곧장 포충사(褒忠祠)로 가 거기서 호남의병지 고유(告由) 인사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어쩔 수 없이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숙소에다 여장을 풀자 고 선생이 찾아왔다. 감기 기운으로 먹은 약에 취해 깜박 하는 새 교통사고를 냈다는데 다행히 당신 몸은 말짱하다고 하여, 조상이 보살핀 탓이라는 덕담으로 위로해 드렸다. 숙소에서 가까운 두부집에 가 이른 저녁을 먹는데 두부전골 맛이 어찌나 담박하고 시원한지 입을 매우 즐겁게 했다. 호남의 음식은 어딜 가서 무엇을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이런 사실을 안 아내가 출발하기 전 호남에 가서 많이 먹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았지만 밥을 반 공기나 더 먹었다.

 

이른 저녁을 먹었기에 숙소에서 심심할까 봐 고 선생 친척 고용석 씨가 굳이 가사문학의 고향인 광주호반 한 찻집으로 안내했다. 식영정, 소쇄원, 훤벽당 등 송강 정철의 자취가 물씬한 곳이 아닌가. 광주호 상공에 상현달이 휘어청 떴다. 문득 송강의 사미인곡 일절이 흥얼거려졌다.

 

하루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녤제 위루에 혼자올나 슈정념 거든말이
동산의 달이 나고 븍극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난다

 

 

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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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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