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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리 멀리까지 누런 구름 뒤덮여 태양을 가리고
북풍이 기러기를 불어 보내며, 눈은 펑펑 쏟아진다
여행길에 나를 이해하여 주는 사람 없다고 슬퍼 말지니
천하가 모두 너를 몰라도 나만은 너를 알아주리라"

- 장경 무협 장편소설 '암왕' 1권 596쪽

무협소설 '암왕'에 실린 시(詩)는 가슴을 후벼 판다. 사파를 대표하는 마교(魔敎)의 성녀(성스러운 여자) '악약', 그리고 목숨을 다해 그녀를 지키는 마교의 수장, '명강량'. 마음은 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운명 탓에 제대로 속마음조차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짧은 글귀에 가득 묻어난다.

"하늘에 맹세합니다.
내가 당신과 서로 알게 되고부터
오래 살며 언제까지나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산에 언덕이 없어지고, 강물이 그 때문에 말라.
겨울에는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여름에는 눈이 내리며
하늘과 땅이 합쳐져도 그대와 헤어지지 않으리다."

- 장경 무협 장편소설 '암왕' 1권 636쪽

'장경' 무협소설 '암왕' 표지
 '장경' 무협소설 '암왕' 표지
ⓒ 로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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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없이 내뱉은 한 마디 노랫가락에도 애틋함이 묻어난다. 낯선 무협소설에서 순정만화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자칫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들에서 저자 '장경'의 섬세한 면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더 끌린다.

그렇다고 마냥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무림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정파와 사파와의 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저자 '장경'은 기존 관념을 거부한다. 올바른 것, 정도(正道)를 외치는 정파도 그리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꼬집는다. 정파이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야비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그래서 더 통쾌하다.

오히려 사파인 마교(배교)가 더 불쌍하다. 설정된 상황이 너무 일방적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정파의 일방적인 협공에 '명강랑'이 위기에 처할 때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명색이 한 정파의 우두머리인데, 정파 중 싸움 깨나 한다는 애들을 만날 때마다 힘없이 무너진다. 그럴 때마다, 원망의 화살은 저자에게 쏠린다. '아니 이왕 만드는 거 좀 더 세면 좋잖아.' 무협소설 '비뢰도'(저자 검류혼) 주인공 '비류연'처럼 애초부터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마교의 수장(대표자)으로서 책임을 다한다. 개인적인 감정은 애써 외면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읽는 이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든다. 그러고보면 사파의 수장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애틋한 마음과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 책 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니 여기까지만. (참고: '스포일러'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 따위를 미리 알려 주어 영화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을 뜻한다.)

에러(Error)

사실 저자 '장경'이 누군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책 한 권으로 섣불리 그를 평가를 하기도 사실 무리다. 인간 '장경'이 아닌 소설 '암왕' 저자로서 그를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결과는? "미지근하다".

책에서 느껴지는 그는 드세지 못하다. 그만큼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 찬 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다. 그냥 그렇다. 글을 읽는 도중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문체에 있다. 책 겉표지엔 '역동적인 힘찬 문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 느낌과는 정반대다. 특히 등장인물의 소개를 할 때 그랬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주변 인물의 눈과 입을 통해 나열하는 식이다. 주인공 '명강량'도 예외는 아니다. 첫 등장(1권 30쪽)부터 사설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옹'(32쪽)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무려 한 페이지가 넘는다. 물론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계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인물 소개 방식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읽는 맛을 떨어뜨린다. 짧은 형용사(꾸밈씨)만으로도 끝낼 수도 있을 듯하지만, 질질 끄는 느낌이 더 강하다. 한 두 번은 괜찮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야기(스토리)도 극적인 맛이 떨어진다. 반전이 없고 내용이 예상대로 그대로 진행된다. 쉽게 말해, 극적인 맛이 없다. 인기 있는 무협지의 공통점은, 주인공의 삶이 극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런 능력이 없다가도, 우연찮게 절세의 무공이 기록된 책을 발견하거나, 엄청난 실력의 스승을 만나 순식간에 고수가 된다. 혹은 생각 없이 먹은 인삼 한 뿌리로 인해 10갑자 이상의 무공을 절로 쌓이게 한다. 무협지는 그런 재미 때문에 인기가 있다. 상식을 벗어나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마치 내가 절세의 무공을 지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면에서, '암왕'의 이야기는 너무 '착하다'.

'암왕'은 '삼국지', '수호지'에 푹 빠진 적이 있는 사람에겐 환영받을지 모른다. 나이가 지긋한 이에겐 말못할 애틋함이 있어 매력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다르다. 요즘 코드는 '재미'다. '암왕'은 '재미'보다는 '예술'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아, 그리고 이건 불편한 점. 2권으로 된 책이 너무 두껍다. 책 크기도 한 손에 딱 잡히는 크기라 역시 두께가 부담스럽다. 책 한권마다 절반씩 쪼개 모두 4권으로 만들면 읽기에 더 편할 것 같다. 순전히 읽은 자의 눈높이에서의 얘기다. 그럼 이만 "뿅~"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암왕 1

장경 지음, 로크미디어(2007)


태그:#암왕, #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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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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