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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좌로부터 고미야마씨, 아오야기씨 부부, 필자.
 좌로부터 고미야마씨, 아오야기씨 부부, 필자.
ⓒ 우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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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상,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일본에 오시거든 꼭 연락 주십시오."

지난 12월 2일 오후 1시, 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시종 밝은 얼굴이었던 휠체어 위의 아오야기 시게오씨 목소리가 흔들렸다.

전신 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감싸안고 인사하는 내 앞에서 그의 아내 노리코씨가 눈물을 보였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힘있게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하던 서른세살 남자 고미야마 게이스케씨의 눈동자도 기어이 흐려졌다.

나는 세 사람이 출국수속실 안 쪽으로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한참 후까지도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지난 2박3일간 함께 했던 시간은 이토록 우리 가슴에 넉넉한 정을 남겼다.

10여년전 동경에서의 '빚'을 이제 갚다

<오마이뉴스>에서 '한일 시민 친구 만들기' 행사에 참여할 시민기자를 모집한다는 사고(社告)를 발견한 것은 신청 마지막 날의 턱걸이 시간이었다. 그동안 시민기자 활동을 하지 않은 나이기에 그 공지를 건성으로 넘기려다가 하단 부분의 '통역 봉사자도 모십니다'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내 머릿속엔 오래 전의 내 이웃이었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갔다. 10여년 전 동경 변두리 한적한 마을에서 가족과 헤어져 홀로 2년을 살 때 신세를 많이 졌던 사람들이었다.

기초 일본어마저 더듬거리던 그 때, 필요한 물건을 어디에서 싸게 살 수 있는지, 외출할 때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할 줄 몰랐다. 당시 한국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을 때라 쓰레기를 왜 분리수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한심한 외국인인 나를 위해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심지어는 혼자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은 나를 동네 사랑방인 작은 술집에 데리고 가 함께 술을 마셔주었고, 노래를 가르쳐 주었으며, 가미오씨 부부는 자청하여 주일마다 내 집까지 와서 한동안 일본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럴 때면 요리가 서툰 나를 위해 가미오씨 부인은 다양한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싸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그 분은 내 입맛에 최대한 맞추기 위해 한국요리 책까지 사서 연구를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단순히 "신세를 졌다"는 표현으로는 적절치 않은, 나로서는 눈물겹도록 너무도 큰 '은혜'였다.

일본인들에게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순간을 기대하며 내가 이번 <오마이뉴스> 행사에 통역사로라도 신청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내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지원했을 그 행사에 내게까지 차례가 올 것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러나 내 불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본어 실력임에도 워낙 자기소개서에 양념을 잘 쳐서인지, 며칠 후 <오마이뉴스>로부터 행사 참여에 대한 안내장과 함께 귀중한 오더까지 덤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행사 통역사로 채용된 것은 물론, 일본인 참가자 중 중증장애인 아오야기씨의 차량 이동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버스로 다니게 되겠지만 그 사람만은 그렇게 할 수 없기에 따로 차가 필요한 상황인데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미안해 하며 말하는 <오마이뉴스> 강지은 기자에게 나는 오히려 매달리다시피 그 임무를 얻어내고야 말았다.

한일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에 참여한 한일시민기자들. 가운데 노란색 담요로 감싸고 있는 사람이 아오야기 시게오씨.
 한일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에 참여한 한일시민기자들. 가운데 노란색 담요로 감싸고 있는 사람이 아오야기 시게오씨.
ⓒ 구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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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오더', 중증장애인 아오야기씨 이동 임무를 따내다

11월 30일 오후 1시, 다른 일본인 일행들보다 한 시간 가량 늦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아오야기씨의 장애 정도는 생각보다 중증이었다. 목을 가누지도 못하는 전신 마비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차에 태우려면 그 분의 책임자를 자처해서 함께 왔다는 고미야마씨와 함께 휠체어에서 들어 좌석에 앉히고, 다시 견학이나 식사를 위해서는 휠체어로 옮겨야 했는데, 그 분이 어딘가 아파할까봐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음의 빚을 탕감받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맞이한 나는 그분을 기쁘게 모시고 다녔다.

그래선지 우리는 자연스레 더욱 친숙해져서 처음의 어색함은 이내 사라지고 내 차 안은 얼마 안 가 농담과 웃음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다니면서도 나는 자동차의 내 옆 자리에 앉은 아오야기씨에 대해 궁금증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인의 세심한 손길을 지켜보면서 내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되셨을까, 저렇게 불편한 몸으로도 어찌 이토록 밝을 수 있을까, 매사에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을까, 부인은 어떤 사람일까' 등등. 내 안의 원초적인 궁금증은 끝이 없었지만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밝은 분위기를 혹시 내 어설픈 질문으로 망치게 될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하루 일정이 끝나면 한국과 일본 양쪽 기자들은 숙소인 강화 오마이스쿨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서로에 대한 취재에 열심이었다. 야외 모닥불 앞에서, 강당 안에서, 그리고 식당에서 한 무리씩 얽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새벽이 오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와 함께 다니던 아오야기씨와 고미야마씨는 말했다.

"한국 <오마이뉴스> 기자들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번에 일본에서 오신 기자들도 <오마이뉴스 재팬>에 기사를 올린 횟수가 적게는 100여건 많게는 250여건 올린 분들입니다. 일본에서 <오마이뉴스>가 창간된 지가 겨우 15개월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 역시 대단한 분들이지요. 나름대로 저마다 한가락씩 하는 분들입니다."

16살 고등학생이면서도 열성적으로 기사를 쓴다는 고바야시 야스히로군.  "전기 관련 일을 하는 틈틈이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며, 이상기 시민기자와 해박한 역사 토론을 하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차는지 이메일로 차후에도 역사 정보교환을 계속하자며 의기투합한 리이 스스무씨.

"아이들을 가르치는 음악선생"이라며 테너 리코더를 수준높게 연주해 보였던 하라다 고이치씨. "원래 직업이 잡지사 기자인데 한국 영화와 드라마 전문가"라며 수준높은 한국어를 구사하던 야마자키 유우코씨. 도회지 젊은이임에도 "지금은 일본 오지로 들어가 살면서 시골생활의 애환에 대한 기사를 써서 꾸준히 <오마이뉴스 재팬>에 올리고 있다" 하여 나를 감탄시킨 우에스기 유키노리씨 등.

통역을 필요로 하여 나를 불러 가운데 앉혀놓고 한국 시민기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일본 시민기자들을 보면서 아오야기씨와 고미야마씨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폐부로 느꼈다.

광성돈대를 돌아보는 아오야기씨
 광성돈대를 돌아보는 아오야기씨
ⓒ 구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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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같은 일본친구를 '선물' 받았다

나는 행사 내내 아오야기씨 부부가 묵던 방의 옆방에서 단 둘이 기거했던 이유 이상으로 고미야마씨와 각별해졌다.

그는 틈만 나면 아오야기씨를 함께 돌봐준 고마움을 내게 표했지만, 오히려 아오야기씨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그를 보며 내 쪽에서 감동을 갖게 하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일본 기자단의 스태프 신분이지만 보통의 동료의식과 책임감으로는 가능치 못할 행동이었다.

식사를 하던 언젠가 내가 일본의 규동(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불고기 덮밥)이 먹고 싶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돌아가는 날 아침 인스턴트 제품이라도 보내주겠다며 내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하던 그의 정감어린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며칠을 함께 했던 아오야기씨 부부마저 일본에 올 일이 있으면 시즈오카현 후지시의 자기 집에 꼭 한 번 와 달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한밤, 모닥불에 고구마를 정성껏 구워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16살 고바야시군을 보며 나 또한 그만한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부성애가 꿈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 오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쉽게 허락하시든?"
"너무 쉽게 승낙을 해 주시는 통에 제가 오히려 놀랄 정도였습니다. 다만, 사고 없이 잘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참 고마웠습니다."


아직 소년임에도 행동과 말투가 어른스럽고 성격이 활달한 고바야시군이 하도 신통해서 다른 일본기자들에게 내가 말했다.

"한국에 인재가 부족하니 이 친구를 한국에 주시지요."

그랬더니 일본 시민기자 한 분이 말했다.

"그럼 가지시지요. 좀 아깝긴 하지만 특별히 부탁하시니 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받겠습니다."


폭소가 끊이지 않았던 그 곳 외에도 <오마이스쿨> 교정 이곳 저곳은 늘 시끄러운 평화와 정이 넘쳤다. 양국 젊은 시민기자들은 아예 통역사들을 제쳐두고 무언가 자기들끼리의 긴 토론을 이어갔는데, 거기엔 각자 아는 만큼의 영어와 한자, 그리고 약간 분주한 몸짓만으로도 충분했다.

"평생 아무 일도 못하는데 깨어나서 기적이라고? 기가 막혔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금방 지나가버리고 만 2박3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묻어있는 이야기들은 셀 수 없이 많기도 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엔 한국 구동관 시민기자가 아오야기씨를 취재할 때에야 내가 통역을 하게 되면서 끝내 알게 된 그의 눈물어린 이야기도 들어 있다.

"스물다섯 때 스키를 타다가 스키장 귀퉁이에 서 있던 나무에 정통으로 머리를 부딪쳤지요. 그리고 2년 반을 식물인간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정신이 깨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말했지만, 전신이 마비되어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내 현실을 쳐다보니 기가 막히더군요. 혼자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을 죽으려고 했지만 나중에 만난 주치의 선생 말씀에 감동해서 이런 모습의 내 자신이라도 소중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결국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행동적 역할'을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그저 살아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 분은 말했습니다. 꽃과 분재가 아무런 행동도 없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갓 태어난 아기가 배고프거나 졸려서 울더라도 부모에겐 그 아이가 소중한 보물이듯, 나 역시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그와 다름없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오마이뉴스 재팬>에 들어가 아오야기씨가 쓴 기사를 읽으면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어쨌든 그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마음을 돌이키니 정말이지 세상이 밝게 빛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디다. 이후 서른두살에 신체마비 전문 간병인인 저 사람을 만나 이듬해 상상도 할 수 없던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작년에 <오마이뉴스>가 일본에서 창간된 것을 계기로 마흔여덟이 된 지금은 글을 쓰게 되면서 기자 생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겐 더 없는 축복이지요.”
"그럼 사고 후에 부인을 만나신 거로군요."
"그렇죠."


순간 나는 그의 아내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노리코씨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고, 말수가 없는 평소처럼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눈에 엷은 미소가 어릴 뿐이었다. 그리고 구동관 기자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아오야기 시게오씨와 부인 아오야기 노리꼬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작별인사와 소감을 말하는 아오야기 시게오씨 아오야기 시게오씨와 부인 아오야기 노리꼬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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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미소에 우린 할 말을 잃었다

행사 마지막 날인 12월 2일 오전 8시 40분, 한일 시민기자들은 함께 서울 관광 예정이 있었지만, 아오야기씨 부부와 고미야마씨는 오후 2시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떠나야 했기에 그들을 공항까지 모셔야 할 나와 함께 오마이스쿨에 남아야 했다. 올 때처럼 약간의 사정으로 일행들과 비행기 편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내 안사람이 평생 수영을 할 줄 몰랐는데, 이 곳 개천에 빠져서 생전 처음 수영할 기회를 갖게 될 정도로 의미있는 한국 나들이였습니다."

한일 시민기자들에게 간단한 작별 연설에서까지 아오야기씨는, 노리코씨가 실수로 개천에 빠져 바지와 신발을 적신 것을 두고 좌중을 웃겼다. 모두의 얼굴엔 이제 여기서 헤어지지만 그들 부부의 행복을 비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 오마이스쿨 뒷마당은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봐 한국행을 망설였다는 아오야기씨 덕분에 오히려 모두에게 더 뜻깊은 만남의 자리로 각인 되었다.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한일 시민 친구 만들기 2007' 행사가 짧은 일정에서라도 한국인과 일본인과의 새로운 정을 도출해내는 목적이었다면 분명 성공한 행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나 개인은 이 기회에 일본인들에게 졌던 깊은 신세를 조금이나마 갚게 됐다는 생각이 가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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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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