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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기자이신 것 같은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건희가 감옥 가긴 가나요?"

지난 28일 새벽녘 귀가길에서 택시기사와 나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30분 간 이어진 대화 도중 나는 여러 차례 난감했다.

심증이 있지만 특검이 물증을 못 찾고 있다. 비자금을 묻어둔 계좌가 너무 많아서 특검 수사로 다 알려지지도 못한다. 수사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찾아낸 것도 지금 공소시효가 만료돼 처벌하기가 어렵다. 그는 설명을 들으면서 매번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되물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화를 마쳤다.

"택시기사들은 속도 위반하고 승차 거부하면 벌금 냅니다. 다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지만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돈 많고 힘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벌 안 받네요."

그렇다. '무전유죄·유전무죄'란 말이,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새삼 각인되는 요즘이다.

삼성에 허물이 있다면 더 크게 보은할 기회를 주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 연합뉴스 배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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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택시기사처럼 많은 국민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실망스럽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이해가 안 되고, 더 실망스러운 사실은 명망 있는 '어른'들이 "삼성을 이제 그만 용서하자"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지난 28일에는 원불교 원로위원들이 특검팀에 원불교 원로위원 45명이 함께 서명한 "특검 수사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조계종 총무원과 원로회의의 29명이 "특검이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며 "사회적 동요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조속히 종결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 청원서에는 "국민들에게는 감사하고 상생하는 마음으로 해(害)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 '은생어해(恩生於害)'의 지혜가 필요한 때"라며 "물질문명을 선도해 온 삼성이 정신문명을 병진(竝進)하는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원불교 원로위원들은 "삼성은 국가 성장 동력의 중심축을 이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국민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해 줬다"며 "허물이 있다면 더 크게 보은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종교인이 이처럼 '관용'을 이야기하면 '실용'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경제를 들먹이며 "삼성 수사를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수원 영통에서 맞붙는 김진표 통합민주당 의원과 박찬숙 한나라당 의원이다.

두 의원은 지난 18일, 20일 릴레이를 하듯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수원 지역은 삼성 협력 기업이 많은 곳인데 특검 수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특검은 조속히 마무리되어야 한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였다"

▲ "걸레는 빨아도 걸레더라" 참여연대, 민변 등 50여개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삼성 이건희 불법규명 국민운동은 지난 25일 오전 서울 한남동 특검 사무실에서 "특검팀이 짜맞추기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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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 전만 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이 정·관계, 법조계, 학계 사회 각계각층에 뇌물을 살포했다고 밝혔고 이건희 회장의 지시 문건이 공개되면서 삼성이 돈이 안 되면 호텔 할인권이라도 줘서 자신의 친구로 만들고자 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때였다. 누구라도 삼성을 공개적으로 비호하려 든다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시기였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침묵했다. 침묵을 통해 삼성을 지켜줬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예전 검찰이 그랬듯 특검도 삼성에게 면죄부를 안겨줄 태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새 정부는 삼성에게 '금산분리 완화', '출총제 폐지'라는 선물까지 안겨주려고 한다. '어른'들도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 '이건희 회장 구하기'에 나설 때다. 삼성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했던가? 10년이 넘는 동안 사회 각계각층을 '관리'해온 힘이 발휘되고 있다.

결국 분노하는 이들은 이건희 회장이 포탈한 세금 수조원이 얼마만큼의 돈인지 상상도 안 되는 서민들 뿐이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지난 25일 특검 수사를 비판하며 "법과 원칙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졌다"고 말했다.

"걸레는 빨아도 역시 걸레였다. (중략) 특검은 국민을 무서워해야 한다. 역사를 무서워해야 한다. 역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만약 특검이 검찰과 같은 결론을 낸다면 삼성노동자와 국민들은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국민들은 안다

삼성 이건희 얼굴의 탈을 쓴 한 시민이 삼성로고가 그려진 핏피켓을 들고 무릎을 꿇고 벌을 서는 모습
 삼성 이건희 얼굴의 탈을 쓴 한 시민이 삼성로고가 그려진 핏피켓을 들고 무릎을 꿇고 벌을 서는 모습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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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특검 수사는 3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오는 4월 8일에 2차 수사 연장을 했을 경우에만 한해서다.

특검팀은 아직 수사 중이라고 답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캐낸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을 듯 싶다. 또 대선불법자금, 삼성X파일,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매각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처럼 '공소시효 만료', '증거불충분'을 이유 삼아 이건희 회장 일가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특검 수사가 그렇게 종료된다면 만만치 않은 '역풍'도 불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들과 김용철 변호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워온 이들을 향해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폭로로 사회의 혼란만 일으켰다"며 떠드는 이들도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이미 알 만큼 다 알아버렸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답 내리고 있다.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는 책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기업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배계급은 체제순응적인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이를 멋지게 색칠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태그:#삼성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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