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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등과 함께하는 명상기행 연두빛 산하에 내걸린 연등을 따라 걷다보면 피안의 세계에 닿을듯합니다. 설악산에서 지리산까지 연등을 따라 걸어 봤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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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로 들어가는 오솔길마다 연등이 내걸려 있습니다. 봉정암으로 가는 대청봉 길에도 걸렸고, 천왕봉으로 오르는 법계사 길에도 걸렸습니다. 울릉도에 있는 대원암, 마라도에 있는 기원정사, 한라산에 있는 존자암은 물론 속리산에 있는 상고암과 능가산에 있는 월명암하며 하나 하나 손꼽지 않아도 목탁이 울리고 염불소리가 들리는 도량이라면 어디어디에 할 것 없이 죄다 걸렸습니다.   

도량이 큰 곳에는 많이 걸렸고, 도량이 적은 곳에는 적게 걸렸겠지만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를 따질 수 없는 게 연등에 담긴 의미입니다. 불탄일(佛誕日)을 맞아 내걸리는 오색연등은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이루는 꽃잎 하나며 꽃잎 하나로 이루어진 세계일화입니다.  

새싹들이 넘실거리는 연녹색 산하, 산자락이나 산골짜기를 따라 산사로 가는 산모퉁이길 옆에서 자라고 있는 나뭇가지마다 알록달록한 연등이 주렁주렁합니다. 조붓한 모퉁이 길을 따라 타박타박 걷고 있는 나그네의 뒷모습도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연등만큼이나 가벼워 보입니다.

알록달록한 연등이 산사로 가는 길마다 내걸렸으니 사월초파일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알록달록한 연등이 산사로 가는 길마다 내걸렸으니 사월초파일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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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도 붑니다. 산사를 찾아 가는 길에서 맞는 5월 바람은 송골송골한 땀방울을 식혀주는 감로바람입니다. 바람에 실린 풍경소리가 마중을 나오는 동자승마냥 산그늘 저만치서 "뎅그렁"하고 울어줍니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5월 산하는 산바람만큼이나 청량하고 꽃향기만큼이나 은은합니다.

바람과 연등은 법거량을 나누는 도반

산사로 가는 길에서 쐬게 되는 5월 바람에는 연등의 아름다움과 풍경소리만 실려 있는 게 아닙니다. 피어 있는 꽃들은 생멸(生滅)을 이야기하고, 흘러가는 물은 하심을 이야기하니 삼라만상의 법문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릴 없이 걷기만 하던 나그네가 잠시 멈춰섭니다. 느낄 수는 있지만 실체는 알지 못하는 바람이 지나갑니다. 풍운거사가 하는 법문을 알아듣지 못한 나그네는 멀뚱멀뚱한 무표정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법거량(法擧量)을 하던 연등은 면벽수행을 하던 선승이 잠시 좌선을 풀고 이렇게 저렇게 몸을 흔들듯 끄덕끄덕 몸짓을 합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에도 연등이 걸렸습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에도 연등이 걸렸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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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연등이 무엇을 속삭였고 어떻게 법거량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머거리가 된 나그네를 향해서도 싱긋하고 웃어 보입니다.

갈증에 물 한 모금 떠먹으려 쪼그려 앉은 계곡물에도 수두룩하게 연등이 담겨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에 물에 담긴 연등을 퍼올리려 텀벙 두 손을 담그는 순간 눈앞에 아롱이던 연등이 좌르르하고 흩어지니 말짱 허삽니다.

목을 축이고, 손바닥으로 연등을 거두겠다는 욕심을 버린 채 한참을 바위에 걸터 앉아있으니 흩어졌던 연등이 어느새 또렷해집니다. 흐르는 계곡 물결에서조차 허허롭게 그네뛰기를 하고 있는 오색연등은 석가탄신일을 찬탄하는 사바 세계의 공양 꽃입니다. 산사로 가는 오솔길, 오솔길과 동행을 하고 있는 계곡에까지 주렁주렁 연등이 달려있으니 그날, 부처님오신 날이 멀지 않은가 봅니다.

연등을 내거는 손길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연등을 내거는 손길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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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습니다. 참 곱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오색연등도 곱고, 일찍부터 연등을 만드느라 꽃잎을 접고 풀칠을 했을 보살의 마음도 곱습니다. 꽃잎을 접던 정성은 불향이 됐을 거고, 풀칠을 하던 근기는 보시공덕이 되었을 거니 오솔길에 피어난 연등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의 마음이며 천상의 꽃입니다.

만개한 꽃들로 넘실대는 5월 산하가 만화방창한 한 폭 수채화라면 주렁주렁하게 연등이 내걸린 5월 산사는 도피안으로 닿아 있는 탱화 속 오솔길입니다. 칠흑처럼 깜깜했던 어둠도 일순간에 오방색 광명으로 밝혀 주는 연등이 산산 골골에 걸려있으니 5월 산사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능파교를 건너는 행복한 발걸음입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연등이 뭐지?"하고 물어 봅니다. 선승이 남긴 구도의 발자취가 연등이 된 걸까? 아니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의 사무친 마음이 저런 걸까? 이런 마음으로 보면 목탁을 닮았고, 저런 마음으로 보니 탁발승이 걸머 메었던 바랑을 닮았습니다. 달덩이처럼 덩그런 모양인가 했더니 갈증을 달래 주던 옹달샘처럼 옴팍한 모습입니다.

조용하기만 했던 산사는 출렁이는 연등으로 황홀해집니다.
 조용하기만 했던 산사는 출렁이는 연등으로 황홀해집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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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다가가 콧방울을 벌름거려 보지만 아무 냄새도 없습니다. 또랑또랑한 눈동자에 비치는 건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는 꼬마전구입니다. 육안으로 보고, 육감으로 맡는 연등에는 느낌도 없고 향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산사로 가는 길에서 내걸린 연등은 고해의 바다에 밝혀진 등불 일수도 있으니 무량겁(無量劫)의 아름다움이며 무시무종의 향원입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연등은 배냇저고리로 감싼 아가동자의 모습

요즘 연등이야 스위치 하나만 올려주면 날씨에 상관없이 오방색 빛들을 쫘르르 하니 쏟아내지만 어린 나그네가 보았던 연등은 배냇저고리로 감싼 아가의 조바심이었습니다. 한지를 붙여 만든 연등에는 한 자루의 양초가 꽂혀 있었고, 빛을 밝히려면 하나 하나의 초에 불을 붙여야 하니 연등을 밝히는 자체가 정성이며 의식이었습니다. 

법당 앞마당에 내걸었다가도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조심스럽게 걷어 들이고, 바람이라도 불면 촛불을 꺼트리는 불경스러운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어린 나그네가 기억하는 초파일 연등은 배냇저고리로 감싼 아가 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연등마다 기도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연등마다 기도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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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라도 궂어 연등을 밝히지 못하면 일 년 내내 마음의 연등을 켜는 것으로 봉축하는 정성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초동(樵童)의 추억에 걸린 연등은 휘영청 밝은 대보름달이었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지개였습니다. 

5월이 되면 연등이 내걸린 '산사로 가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산 저산을 넘어 다니는 바람이 되어 산사로 가는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습니다.

초파일 연등으로 내건 <열림>은 행복빛깔 제법무아

거닐던 발걸음이 헛헛해지면 잠시 벌 나비가 되어 꽃잎에 머물고, 인연을 맺고 싶은 고운 도반을 만나면 마음의 풍경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되고 싶습니다. 바람이 부럽습니다. 하늘하늘한 발걸음으로 훌훌 산봉우리를 넘어 다닐 수 있고, 오방색 연등과도 무주무애하게 속삭이거나 법거량을 할 수 있기는 바람이기에 부럽습니다.

어린 나그네는 보름달을 따겠다며 망태기를 둘러메고 앞동산에 올라 장대를 휘둘렀고, 중년이 된 나그네는 본래 면목을 보겠다며 걸망을 둘러메고 연등 길을 걸으며 108염주를 돌려봅니다.

비록 어둠 속일지라도 연등이 밝히고 있는 길은 따라가기만 하면 피안의 세계에 닿을듯합니다.
 비록 어둠 속일지라도 연등이 밝히고 있는 길은 따라가기만 하면 피안의 세계에 닿을듯합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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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바람을 피우면서도 바람이 되지 못하는 나그네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의 마음으로 "뎅그렁 뎅그렁" 울어봅니다. 바람둥이가 된 나그네의 상념은 계곡물에 담긴 연등을 연모하고 있는 일엽편주 두둥실입니다.

산사로 가는 5월 산하에 걸린 연등은 불탄일을 봉축하는 불심의 꽃망울이며 불심으로 피워내는 천상의 꽃이기에 가없는 행복이고 아름다움입니다. 봉정암 가는 길을 5년 동안 걸으며 탁발한 이런 마음 저런 느낌을 또 한 권의 책 <열림>으로 펴내 초파일 연등으로 내건 나그네의 마음은 행복빛깔 제법무아입니다.

덧붙이는 글 | 동영상의 배경음악은 '지리산 흙피리 소년 한태주'가 오카리나로 연주한 <산사의 새벽>입니다.

이 글은 월간 <불교>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연등, #초파일, #열림, #봉정암, #법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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