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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파리. 권총과 곤봉, 무기와 칼을 든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왕의 군대에 맞서고 있다. 신성하다고 느껴질 만큼 빛이 나는 포연 앞에서 자유의 여신은 소년을 데리고 소총과 삼색기를 들고 무너진 바리케이드를 짓밟는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시체들을 넘어 전진한다.

그림의 전경에는 시민봉기자, 왕당파 양쪽 진영의 희생자들이 쓰러져 있다. 죽은 사람 옆에는 삼색기 색상의 옷을 입은 안 샤를로트(억압된 프랑스를 의미)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 앞에 서있는 저돌적인 여인의 형상이 마치 자신을 다시 소생시키고 있는 것처럼, 그 여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여인의 형상은 자유와 공화제를 의인화한 인물인 마리안이다. 그녀의 가슴은 호전적인 아마존족 여인의 가슴처럼 노출되어 있으며, 양손에는 각각 총과 삼색기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혁명'을 묘사한 그림이다.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는 대상은 노동자와 거리의 젊은이들이다. 왕의 군대는 그림의 앞쪽에 찢어진 상의에 군모도 없이 죽은 채로 묘사되어 있다.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주체가 누구였는가를 그림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의 파리는 폐지되었다고 믿었던 압제의 구체제(앙시앙 레짐, 1789년 프랑스혁명 전의 절대왕정)가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번져가고 있었다. 혁명 당시 처형되었던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1814년 망명지로부터 소환되어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를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 폭의 그림이 지니는 힘은?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삼형제 중 막내인 샤를 10세가 랑스에서 중세의 화려한 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귀족들에게 옛날 칭호와 특권을 되돌려주고, 혁명중 잃은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에게 10억 프랑을 수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1830년 7월 25일 샤를 10세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대다수의 시민들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독재적 행위를 단행하자, 민중의 분노는 더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830년 7월 28일. 민중들이 일어섰다. 우리는 이때 상황이 어떠했을지 그림과 글을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영국 단장(斷章)-1830년 11월'에서 '7월혁명'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 파리의 위대한 1주간!
거기서 불어오기 시작한 자유에의 용기는 물론 도처에서 침실 등불을 넘어뜨렸고,
그리하여 몇몇 왕좌의 붉은 커튼이 화염에 휩싸이고,
금빛 왕관이 활활 타오르는 취침용 모자 밑에서 달아올랐다.
그러나 옛 추적자들은 금방 소화용(消火用) 양동이를 끌어오고,
이젠 더 주의깊게 염탐하고 다닌다

아마도 이날의 파리의 풍경은 이러했을 것이다. 샤를 10세의 용병들이 좁은 골목길에 총을 쏘며 길을 내는 동안, 시민들은 창문에서 가구와 빨래통, 기왓장과 연장통 등을 내던졌을 것이다. 또 용병들 다리 사이로 우마차에 가득 실은 멜론을 쏟아붓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는 시민들의 것이었다. 1830년 8월 3일 샤를 10세는 퇴위했고 도망치듯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급진적 자코뱅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다비드'
다비드 자화상, 1794,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 자화상, 179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민중봉기를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던 들라크루아는 붓과 팔레트를 집어들었다. 그는 1830년 10월 형인 샤를 앙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함께 싸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조국을 위해 적어도 그림이라도 그리려 해요." '혁명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1830년 7월 28일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7월혁명으로 인해 '시민왕'으로 등극한 루이 필리프는 1831년의 살롱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산후 30년간 숨겨두어 다른 혁명을 점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했다. 바로 이것이 한 폭의 그림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닐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물론, 들라크루아의 '소심함'을 들어 '혁명미술'의 한계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여기, 7월 혁명에 앞서서 일어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절, 정치에 정력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의 본보기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혁명 초기,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적 자코뱅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다비드'.

그는 1792년에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기까지 할 정도로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1793년까지 그는 예술위원회 위원으로서 프랑스 예술의 '자코뱅'이었고 그 때문에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비드의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마라의 죽음'

다비드는 예술가로서 혁명의 선전물을 제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기념 메달을 만들었고 각 지방에 오벨리스크를 세웠으며 국민 축제와 정부가 주최하는 희생자들의 장엄한 장례식을 기획하기도 했다. 자코뱅당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마라의 죽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혁명 지도자 마라가 반대파에게 암살당한 직후인 1793년에 그린 것이다. '혁명의 피에타'라고도 불린 이 작품은 다비드의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

마라는 다비드와도 가깝게 지냈던 인물로, 프랑스 혁명기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지롱드파에 동조한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살해당했다. 마라가 욕조 속에서 살해된 바로 다음날 그 장면을 그려달라는 청을 받은 다비드는, 현명한 인물을 잃은 데 대한 슬픔의 감정을 그림에 담았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다비드 자신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는 다비드가 1793년 10월 14일 이 그림을 완성한 후,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한 말을 통해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시민 여러분, 사람들은 나의 작품에서 그들의 친우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다비드, 붓을 들어 마라의 원수를 갚으시오. 죽음으로 변모된 마라의 얼굴을 보고 원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되도록 하시오'라고 권고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림에서 마라는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암살자가 거짓으로 써서 보냈던 편지를 아직도 쥐고 있다. 편지에 피가 묻어 있지만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범인의 이름은 선명하게 보인다. 마라의 목 아랫부분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욕조에 고여있으며, 그의 오른손 옆을 보면 핏자국이 남은 단도가 보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라는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펜과 잉크를 꽉 붙잡고 있다.

여기저기에 남은 핏자국이 이 끔찍한 죽음의 비통함을 더해준다. 욕조는 흰 천으로 덮여 있는데 마라의 혁명적 저술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흰 천과 죽음을 맞은 마라의 자세는 예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혁명세력은 전체 민중을 위해 교회의 소유물을 국유화했다. 이제 종교는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마라는 그 새로운 시대의 순교자였다. 다비드는 욕조 앞에 놓인 낡은 나무 탁자를 통해 마라의 검소함을 강조하면서, 이 탁자의 전면에 마치 묘비처럼 마라를 추모하는 사인을 그려 넣고 있다.

예술은 사회적 토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1793년 10월 15일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국민의회에 넘겨주었다. 그것은 혁명의 상징자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의 복제품을 향불연기가 피어오르는 교회 제단 위에 전시했다. 심지어 그 복제품을 십자가상이나 왕의 초상화들 대신 관청 사무실에 걸게 할 계획까지 세워졌다. 그러나 한발 앞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했고, 다비드는 체포되었다. 1795년 2월 10일 다비드의 그림이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제거되었다. 잘 보관되어 있던 마라의 심장은 이때 화장되었고, 그 재는 몽마르트르의 하수도에 뿌려졌다고 한다.    

당시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 마리오 프로카치노(Mario Procaccino)가 물의를 일으키자 일러스트레이션 에드워드 소렐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해 프로카치노를 풍자했다. 뉴욕의 전쟁이라는 커버 기사의 제목 아래 포로카치노는 자유의 여신 자리에서 총과 깃발을 들고 서 있다.
▲ <타임> 1969년 10월호 표지 당시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 마리오 프로카치노(Mario Procaccino)가 물의를 일으키자 일러스트레이션 에드워드 소렐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해 프로카치노를 풍자했다. 뉴욕의 전쟁이라는 커버 기사의 제목 아래 포로카치노는 자유의 여신 자리에서 총과 깃발을 들고 서 있다.
ⓒ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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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비드는 보나파르트주의자(나폴레옹 지지자)로 변신해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진저리나도록 따분하고 허영에 찬 특권계층의 유한 취미에 봉사하는 미술이 아니라 국민들을 교화·개선하고 혁명적 행동을 고무시키는 모범으로서 애국적 정신과 공화주의적 자유이념 등 '혁명의 에토스(ethos)'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민중의 교화와 개선은 물론,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모범으로 간주되었으며 이 때문에 혁명과 더불어 예술은 정치적 신조가 되었다. 예술은 '사회라는 구조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현재까지 이어지며 거리연극으로, 시사만화로, 또 남아공 무혈혁명을 기념하는 그림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1789년 프랑스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을 두고 한 다음의 글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그 여명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게다가 젊다는 것은 참으로 천국과도 같았다!


태그:#들라크루아, #자유의 여신, #프랑스혁명, #다비드,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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