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상의 여인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여인"이라고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말했다. 그래서일까. 미술사에서 이름을 떨친 여성화가를 꼽아보자니 수를 헤아리는 손이 민망할 지경이다.

여성화가, 20세기 들어와서는 더러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남녀를 차별하는 사회 분위기와 교육의 불평등을 꼽고 있다.

왕립 아카데미 여자 회원들은 어디에?

요한 조퍼니 <왕립아카데미 회원들>
 요한 조퍼니 <왕립아카데미 회원들>
ⓒ 요한 조퍼니

관련사진보기


이 그림을 보자. 요한 조퍼니는 1771~1772년에 걸쳐서 새로 설립된 왕립 아카데미를 축하하는 미술가들이 남성모델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모여있는 그룹초상화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을 그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회원들 중에 여성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1768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 설립단원 중에는 앙겔리카 카우프만과 메리 모저라는 두 명의 여성 미술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상한 일이다.

요한 조퍼니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에 그녀들을 분명히 그려넣었다. 어디 있을까?

답은 바로 모델들이 서있는 무대 뒤 벽에! 조퍼니는 이 두 여성 회원의 상반신 초상화를 그려넣는 것으로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을 '모두' 그려낸 것이다.

요한 조퍼니 그림 부분확대도
 요한 조퍼니 그림 부분확대도
ⓒ 요한 조퍼니

관련사진보기


이 그림은 당시 여성화가들이 처해있던 어려움들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 그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술에 대한 논의 속에 두 여성 회원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아카데믹한 훈련과 표현의 기초가 되었던 누드 모델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정숙한 숙녀가 벌거벗은 남성의 몸을 그린다니! 만약 그렸다면 그들은 미심쩍은 윤리관을 가졌다고 의심받았을 것이다. 조퍼니의 그림은 왕립 아카데미 미술가들의 이상을 담은 것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카우프만과 모저는 미술작품의 생산자가 아닌 대상물로 표현되었다.

즉, 이 여성미술가들의 초상화는 남성 미술가들이 사색하고 영감을 얻는 대상이었던 부조 작품이나 석고상들과 나란히 놓여있다. 그들은 '재현물(representations)'이 된 것이다. 즉 미술사의 흐름에서 여성은 생산자라기보다는 재현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다. 옛 여성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왠지 모를 어색함, 특히 인체 드로잉이 미숙했던 이유. 그녀들은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예로 들어보면 당시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솜씨뿐 아니라 고대 미술에 대한 지식과 함께 원근법, 해부학 등 여러 학문에 정통해야 했다. 또 이 도시 저 도시를 찾아다니며 대가들의 미술기법도 익혀야 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은 그런 교육의 혜택이나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19세기 말까지 여성은 나체를 모델로 하는 누드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가장 궁극적 단계인 이 과정을 박탈한다는 것은 실제로 중요한 예술작품 창조의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마치 의과 대학생들에게 인간의 몸을 해부할 기회를 주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것을 살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남성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부학적 지식이 빈곤한 여성 미술가들은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서사적 주제를 다루지 못했다.

19세기 중엽까지 여성 화가의 주제는 초상·정물·풍속에 한정되었고,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던 서양미술사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금녀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젠틸레스키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이런 악조건을 딛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남성 못지않은 성취를 이룩한 강하고 개성적인 여성 미술가들도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년). 그녀는 여성화가의 일반적 규칙을 깨고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서양 미술사에서 금녀(禁女)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여성화가이다.

한 남자의 품에 안겼던 부드러운 소녀였을 유디트.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고 싸늘하게. 서양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의 수줍은 눈짓이나 옆으로 돌린 시선을 찾아볼 수 없다. 유디트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살인현장은 충분히 끔찍스럽다.

유디트의 칼이 유대민족의 원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반쯤 꽂혀있고, 그녀를 돕는 하녀는 죽음의 공포에 에워싸인 홀로페르네스를 옆에서 꽉 붙들고 있다. 그의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아올라 흰 침대를 적시고 있다. 하얀 시트의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는 피는 마치 진짜같다. 그 '더러운' 피를 안 묻히고자 팔을 걷어붙인 모습에서 그녀가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유디트는 아시리아인들로부터 민족을 구해낸 유대의 영웅이고, 홀로페르네스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던 아시리아의 장수이다. 유디트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적진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하고 잠든 틈에 칼로 죽인 여인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고향 티란의 베툴리아를 해방시켰다.

젠틸레스키에게 이 작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정의의 구현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을 배제하던 공적 영역에서 여성 역시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규준을 초월한 여성영웅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 유디트는 미모의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남성을 당차게 물리치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이다. 근육질의 에너지 넘치는 여전사는 예전의 서양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이며,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남성을 압도한다. 그림 안에서 여성의 육체적 힘을 포착하여 표현한 점은 서양회화사에서 전례가 없다.

남성욕망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자를 희생시킨 여인인데도 남성화가들은 아래의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그녀를 달콤하고 감각적으로만 묘사했다. 그러나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다르다. 그녀는 남성의 성적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1515년, 로마 도리아-팜필리미술관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1515년, 로마 도리아-팜필리미술관
ⓒ 티치아노

관련사진보기


틴토레토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50/1560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틴토레토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50/1560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틴토레토

관련사진보기


그래서 그녀는 페미니즘 미술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 매혹적인 몸으로 남성을 꾀어내는 이미지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당당히 승리를 얻어낸 새로운 유디트로 탄생시킨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강한 유디트를 그려낸 젠틸레스키가 얼마나 강인한 성품을 지녔는지는 미뤄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이 강한 성품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에는 그녀 개인의 남다른 아픔이 있다.

십대였을 때 그녀는 이미 천재적인 화가의 면모를 드러냈고, 23살이 되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초와 아버지의 친구 아고스티노 타시는 그녀에게 당대를 풍미했던 카라바조 풍의 강렬한 명암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타시는 그녀의 재능보다 엉뚱한 데에 관심이 많았고,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딸이 17살 되던 해에 타시를 상습강간범으로 법원에 고소했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피해자임에도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화가의 길을 걸었다.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영국왕실소장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영국왕실소장
ⓒ 젠틸레스키

관련사진보기


자화상을 봐도 알 수 있다.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그녀. "나는 화가다"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듯하다. 당시까지 '재현의 대상'으로 밖에 미술사에 기여하지 못했던 그녀들. 하지만 젠틸레스키는 이제 여성인 나도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했던 것이다.

젠틸레스키는 작품을 주문한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이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확실하게 독자적인 '해방된' 여성임을 표방한 화가였던 셈이다.

여성이란 오직 매혹적인 몸으로써 남성들에게 대상화되는 존재가 아님을 선포하고,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젠틸레스키. 하지만 여성의 몸을 그저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기까지는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세월에는 여성의 성(性)을 성적 대상이 아니라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의식을 가진 젠틸레스키의 후배 여성미술가들의 고군분투가 있었다. 그녀들은 내 몸은 내 것이라는 관점, 더 이상 내 몸을 타자화하지 않겠다는 의식, 말하자면 내 몸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여성이자 미술가였다.

직업모델 출신 화가 수잔 발라동, '객체'에서 '주체'로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83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83
ⓒ 수잔 발라동

관련사진보기


이 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를 내어놓고도 차분하지만 당당하게 관찰자를 쳐다보고 있다. 흔히 벗은 여체를 그린 그림 속 여성들은 꿈꾸듯 애매한 눈빛으로 관찰자를 사선으로 비껴보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그림 속 여성은 자신이 자기 몸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 그리고 그림 속의 여인도 발라동이다. 그녀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전혀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 특히나 이 때 그녀는 방금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고 한다.

방금 아이를 낳은 여인의 몸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즉 에로틱한 제재로는 적당하지가 않다. 어느 남자도 늘씬한 처녀의 몸 대신 아이를 낳고 방금 몸을 푼 여인의 몸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낳은 발라동의 몸은 결코 남성들의 눈길, 그들의 성욕의 대상이 아니다. 그 몸은 여성인 화가의 자기 주장일 뿐이다.

게다가 그녀가 남성화가들의 성욕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누드화 속에 나오는, 바로 그 모델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그림을 그려낸 그녀가 더 놀랍게 여겨진다. 풍만하고 아름답고 유혹적이고 무방비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남성 화가들의 시선을 버텨낸 그림 속의 벌거벗은 여인이,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을 그리기 시작한 것 자체가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세탁부에서 식당 종업원, 서커스 곡예사로 전전하다가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화가들을 만나 직업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 로트레크, 샤반, 드가 등 기라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르누아르 <머리를 땋고있는 수잔 발라동의 초상화> 캔버스 위에 유화, 56x47cm, 바덴, 랑 마트 재단, 1884
 르누아르 <머리를 땋고있는 수잔 발라동의 초상화> 캔버스 위에 유화, 56x47cm, 바덴, 랑 마트 재단, 1884
ⓒ 르누아르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모델이 역할을 바꿔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흔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엄청난 내면적 독립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여성은 영감을 주는 '객체'였고, 남성은 창조하는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라동은 예술가로서 재능과 열정이 있었음에도 모델인 그녀가 여성화가로서 인정받기까지는 힘든 투쟁을 거쳐야만 했다.

그녀를 키운 건, 팔할이 그녀 자신이었다. 체계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대신 그녀 자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어깨 너머로 데생을 배웠다. 자신의 선을 찾기 위해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읽어내는 힘을 기르기 위해, 그녀는 십여 년을 숨어서 혼자 공부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확신이 선 뒤 그림을 공개했을 때, 세상은 기존 남성화가들의 그림들과 전혀다른 초상화와 누드를 볼 수 있었다.

인물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표현해낸 초상화들, 그리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여인의 나신들…. 이전에 남성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누드가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미화된, 보여지는 사물로서의 여성이었다면, 그녀의 벌거벗은 여인들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평범하고 다소 살찌고 억센 몸매에 삶의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여성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듯 자신의 일이나 생각에 몰두해 있는 여성들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난하고 억세었던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여인의 육체이고 삶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외관이 아니라 그러한 육체에 배어 있는 신산스럽고도 절실한 삶의 감정이었다.

수잔 발라동 <푸른방>,1923
 수잔 발라동 <푸른방>,1923
ⓒ 수잔 발라동

관련사진보기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두 여인들>,1923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두 여인들>,1923
ⓒ 수잔 발라동

관련사진보기


누드 그림이 왜 이래? 프리다 칼로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모품으로 기능하는 여성누드에서 과감한 일탈을 시도한 작가는 비슷한 시기에 멕시코에도 있었다. 그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그녀의 그림은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감상자를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가슴을 가르고 몸을 관통하며 솟아오른 이오니아식 기둥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몸에는 못들이 화살처럼 박혀있으며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척추환자용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다.

피흘리고 고통받는 여성누드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더 이상 남성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프리다는 또 서구 미술계에서 거의 다루어진 바가 없는 출산·유산·낙태·월경과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등 터부를 깨뜨리기도 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선구자이자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미술사를 살펴볼 때, 그녀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주제를, 절대적이고도 비교할 수 없는 솔직함으로 다룬 첫번째 여인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척추> ,1944
 프리다 칼로 <부서진 척추> ,1944
ⓒ 프리다 칼로

관련사진보기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 프리다 칼로

관련사진보기


1930년 프리다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낙태를 해야했고, 이어 가진 아이도 1932년에 유산했다. 프리다는 유산의 충격을 그림으로 그렸다. 프리다의 아랫배 쪽 하얀 침대 시트는 피에 흥건히 젖어있으며 배는 임신 때문에 아직도 약간 불러있다. 골반 주위의 피바다 위로 뻗은 리본은 탯줄이 되어 자궁에 있는 자세의 거대한 남자 태아 배꼽에 묶여있다. 이 태아는 유산으로 잃은 아기다.

프리다의 누드는 남성의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리게 하고 있다. 칼로는 앞서말한 금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모습을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 아니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그녀는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미술계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고릴라 가면을 쓴 까닭

이어 1980년의 여성미술가들은 그림 속 여성들이 묘사되는 방식을 개선해보자는 개인적 차원의 변혁에서 벗어나, 여성미술가들의 처우와 그림 속 여성들의 모습을 같이 바꿔보자는 집단적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게릴라 걸즈'의 활동이다.

게릴라 걸즈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 하는가?> ,1989
 게릴라 걸즈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 하는가?> ,1989
ⓒ 게릴라 걸즈

관련사진보기


이는 실제로 게릴라걸즈가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에 항의삼아 붙여놓은 포스터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이 단 5%의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걸고 있는 반면, 이 미술관이 소장한 누드 중 85%가 여성이다".

즉 여자는 누드로서만 미술관에 들어가기가 쉽고 작가로서는 미술관에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다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남성 전용 마초미술관'이라고 이름을 달지 않은 공공기관의 하나인데도 말이다. 게릴라걸즈는 이같이 아연실색케 하는 현실을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에 화난 고릴라 마스크를 씌우는 방식으로 날카롭게 고발하고 풍자했다.   

게릴라 걸즈의 모습
 게릴라 걸즈의 모습
ⓒ 게릴라 걸즈

관련사진보기


게릴라 걸즈는 198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예술가를 초청하여 진행한 '회화와 조각 국제 통람(An International Survey of Painting and Sculpture)'이라는 전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이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 중 여성들은 단 13명뿐이었으며 모두 미국와 유럽 출신의 백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미술계에 여성과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부터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포스터·스티커·책·인쇄물 등의 활동을 통해 정치계·예술계·영화계 등  전반적 문화계의 성차별을 폭로해왔다.

개인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들은 고릴라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하며, 지금 역시 그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세상의 모든 차별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게릴라 걸즈는 한 인터뷰에서 "성차별로 손가락질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미술관들이 우리 포스터를 전시하고 있다"며 "도서관에서도 우리 포스터들을 문서기록실에 보관할 정도"라고 자신들의 활동결과에 만족을 표시했다고 한다.

'여성' 수식어 뗀 '미술가'를 꿈꾸다

그렇다. 예전보다 여성들의 지위는 확실히 나아졌다. 여학생을 누드 클래스로부터 제외시키는 원시적인 성차별도 극복됐으며, '여성차별'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의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세상은 잘 '실천'하고 있을까. 아직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50%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그 비율만큼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을까?'를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사실 '여성미술가'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직업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식의 표현은 남성들이 형성하고 있는 기존 사회에 여성들이 합류하는 것을 특별하고 남다른 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흔히 우리가 '남성미술가'라는 말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미술가'들의 글을 따로 써야하는 것도 일종의 불행이다. '여성미술가'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 또 더 이상 그들이 세상과 차별과 억압에 항거할 필요가 없는 것. 그래서 이런 글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그 때가 바로, 여성이 '미술가'로서의 지위를 진정으로 얻게될 순간이지 않을까싶다.


태그:#페미니즘, #젠틸레스키, #수잔 발라동, #프리다 칼로, #게릴라 걸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