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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

김영세는 넓은 강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에는 나룻배가 없었다. 강이 온통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강바람이 혹독했지만 그는 뚝섬 여각에서 마신 술기운으로 차가움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강 건너 멀리 삼전도가 보였고 그곳 옆으로 암사동이 눈에 들어 왔다. 지난 여름 홍수로 한강변의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그는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었다.

모처럼 자연과 만나는 그는 기분이 상쾌했다. 그는 돌산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돌산에는 운치 있는 초가와 기와집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었고, 집 근처에는 어김없이 지붕과 강변을 굽어보고 있는 큰 소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서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그림 속의 인물처럼 배경과 동화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강폭이 넓다고 해서 광나루였다. 조선 왕조가 한양에 천도를 단행한 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수리와 조운이었다. 한강은 한반도의 허리였고 나루는 그 허리의 핵심이었다. 석기 시대부터 그의 조상이 살았다는 한강변의 언덕에 서서 그는 풍경을 조망하고 있었다.

풍경을 보고 감동하기 위해서는 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보는 풍경이라고 해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풍경일 리 없었다. 그런 이에게는 기암절승도 사납게 생긴 바윗덩어리에 불과하며 산악의 심원도 단순한 산들의 중첩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음이 있는 장님은 풍경을 보지만 마음이 없는 속인은 풍경을 못 보는 법이었다.

김영세는 풍경을 보는 데 남다른 눈과 마음이 있었다. 그는 눈을 조그맣게 오므려 보았다. 하얗게 결빙된 수면에서 햇빛이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약동하고 있었다. 투명한 겨울 날씨였다. 건너 편 들과 산이 아주 가까워 보였다. 파란 하늘에서 구름 덩이가 몇 점 부유하고 있었다. 수면을 핥고 온 칼바람이 영세의 두루마기에 스며들었다. 그는 단박에 코가 멍멍해졌다. 불현듯 그는 정화의 이름을 불러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코가 멍멍해져서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는 비현실적인 착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하얀 얼음을 치마로 끌며 강을 건너고 있는 정화를 보고 있었다. 이어 그는 강 건너에서 손짓하고 있는 정화도 보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든 다음 하늘을 보았을 때는, 구름 사이에서 알 듯 말 듯 웃음 짓고 있는 정화의 얼굴도 보게 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풍경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는 마음에 박혀 있던 작고 아픈 쇠붙이로 해서 가슴을 여미고 있는 왜소하고도 서정적 청년이 되어 있었다.

정화의 편지

선생님의 만년필을 두 번째 사용해 봅니다. 남편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묻기에 남자 친구가 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참 많은 것을 하는 여인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상해에는 푸성귀가 많답니다. 미역이나 김은 드물지만, 여러 종류의 배추가 많아서 언제나 다양한 김치를 먹으며 지냅니다. 그러나 이곳 생활은 그저 하루하루를 겨우 꾸려갈 정도로 곤궁합니다. 식생활이라고 해야 주먹밥에 한두 가지의 반찬이면 족할 정도이니까요.

이곳에서 저는 한복 대신 짱산이라는 중국옷을 입고 지냅니다. 임정 분들은 대부분 이 옷을 입습니다. 싼 옷감으로 쉽게 만들어 입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복은 아주 고급 의상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았습니다. 지난 번 서울에서 뵈었을 때 입은 한복은 사실은 신의주에서 갈아입고 간 것이었습니다.

식생활이나 의생활이 빈약하듯이 제대로 된 신발도 신기도 어렵습니다. 운동화나 구두는 엄두도 못 내지요. 손으로 만든 헝겊신이나 짚신을 신는 경우도 흔합니다. 백범 선생님은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셔야 하니까 헝겊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남편은 젊은 동지들과 늘 독립운동을 도모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 남편은 일본인 주요 인물에 대한 테러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일에는 자금과 조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계획만 세우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여전히 저는 독서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문학과 역사를 좋아합니다. 최근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한 남편 덕으로 책은 그런 대로 구할 수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석오 이동녕 선생은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늘 두 가지를 당부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먼저 생활의 기반을 잡을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지런히 책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백범은 예전에 내무부 경무국장을 지냈습니다. 그 분은 임시정부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전에 제가 상해로 올 때 돈을 받고 제 여권을 만들어 준 정필화는 본격적인 일본 밀정 노릇을 하면서 상해 임정에서 정보를 빼 갔던 모양입니다. 그는 임인석이라는 심복 부하를 데리고 다니며 독립군을 고발하고 독립 운동가들의 동향을 일본 경찰에 알렸습니다.

특히 임인석이라는 자는 독립 운동가뿐 아니라 선량한 한인들에게 모함을 씌워 일본군에게 넘기겠다고 협박하여 동포들의 돈을 갈취했다고 합니다. 고향인 전북 익산에서도 3·1운동 때 이웃 학생을 고발한 것이 알려져 마을에서 쫓겨 도망쳐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온정을 베풀며 접근했다가, 동포의 약점을 잡아 고발하거나, 사전 협박으로 돈을 뜯어냈다고 합니다. 백범이 이들을 상해 아편 골목에서 붙잡아 처단한 후, 밀정들이 감히 임시정부를 엿보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또한 백범은 테러 투쟁에 관심이 높습니다. 그 분은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좀처럼 돈을 쓰지 않습니다. 백범에게 돈이 가면 나오는 법이 결코 없다는 말을 어른들은 우스개로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일부 생활이 나은 분들은 가끔씩 백범에게 돈을 줍니다.

백범은 워낙 체격이 커서 식사 양이 많은 편입니다. 어쩌다 자금이라도 생기면 그는 임정의 살림 비용에 보태거나 책임 맡고 있는 애국단의 무기 비용에 쓰느라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먹고 사는 게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이따금 우리 집에 들릅니다. 주로 오후 늦게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밥 좀 주실 수 있나요?”

그는 어려운 사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아녀자에게는 언제나 친절하면서도 격의가 없이 대합니다. 저는 급히 반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지어 드리곤 합니다. 아마도 백범만큼 밥을 달게 드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 하루 종일 앉아 줄담배를 피우기도 합니다. 통담배라고 해서 50개 들이 담배가 있는데 백범은 그것을 하루에 다 피워 버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백범은 최근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작은 경비라도 아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는 요즈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남경에 다녀오신 이시영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지난 번 말씀 드렸듯이 그 분은 저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는데, 늘 헝겊신만 신고 다니는 제가 측은했던지 놀랍게도 구두 한 켤레를 사다 주셨습니다. 저는 김 선생님께서 주신 만년필 다음으로 이 소중한 구두를 아끼고 있습니다.

갑자기 인편이 생겨 두서없이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뵈올 행운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존경하는 정화가.

길림에 온 안창호

1927년 2월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 안창호는 북경을 거쳐 길림에 도착했다. 길림 한인 교포 사회는 약간 들떠 있었다. 한인 교포들은 안창호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안창호를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거국가를 합창하며 안창호를 환영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나 간다고 설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거국가는 안창호가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를 때에 지어 불러 유행시킨 노래였다. 식민지의 뜻있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애창했고, 이 노래 이상으로 안창호를 사랑했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은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임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 그가 독립운동의 선배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안창호를 탐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에게 조각권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안창호는 조선 민족의 질을 높이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총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고 정진학교, 대성학교, 태극서관 등의 교육기관 등을 설립하여 민족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원로급 독립 운동가 중에 이승훈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기 장사를 하면서 돈을 크게 모았는데, 이런 사람이 평양에 갔다가 안창호의 개화 계몽 연설에 감동받아 상투를 자르고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신념에 차 있는 안창호의 연설이 상인을 독립지사로 바꾼 것이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안창호의 길림 도착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청년과 학생들은 그가 묵고 있는 삼풍여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안창호에게 길림성 교포 학생들을 위해 강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안창호의 길림 강연은 이렇게 해서 성사된 것이었다.

청년과 학생들은 안창호의 강연 소식을 알리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길림의 주요 거리인 차루가, 통천가, 하남가 등의 곳곳에 벽보를 붙였다. 벽보를 본 길림의 교포들은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도산 선생이 오셨다지요?” 라고 서로들 확인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최근 김갑수의 또다른 신작 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가 출간되었습니다.(어문학사)



태그:#백범, #이시영, #안창호, #임인석, #길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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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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