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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을 뒤적이다 낯을 붉히게 만드는 여러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여름휴가를 보냈던 충남 태안군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촬영한 것인데 웃음이 묻어나다가도 생각 없이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게 했다.

지난 1999년 같은 직장 한 부서에 근무하며 친해진 4명의 남자는 '네 사람 머리는 한사람보다 낫다'는 신념으로 의형제를 맺었다. 생각의 깊이가 비슷하고 술을 좋아했던 형제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만들어 삐뚤어진 세상에 똥침을 가하며 소주잔에 울분을 삭여 마시곤 했다.

그 당시 민사모(민물고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단체를 만들어 환경 정화와 외래어종 퇴치 활동을 했다. 지난 2002년 효순 미선양이 미군의 장갑차에 의해 희생되고 미군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자 형제들은 '미군이 무죄라면 장갑차라도 구속시켜라'는 현수막을 민사모 이름으로 내걸었고 작은 촛불추모제도 열었다.

조용하던 시골 읍내에 이런 현수막이 내걸리자 경찰서 정보과는 민사모의 근원을 찾느라 분주했다. '민주화를 사랑하는 모임'으로 착각했다가 민사모의 본말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는 후문이다.

이밖에 낚시를 통해 잡은 월척급 고기를 깨끗하게 손질해 마을 경로당에 가져다 주기도 했다. 모든 행사의 끝은 항상 술자리로 이어졌고 휴일에도 집보다 밖에 있는 날이 많다 보니 안사람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결국 '형제모임 해체'라는 극약처방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형제들은 가족의 불만을 삭여 보자는 고민 끝에 여름휴가를 제안했고 여행지는 충남 태안 몽산포해수욕장으로 결정됐다.

몽산포 모래갯벌을 공사판으로 만들다

파헤쳐진 모래갯벌에서 비단조개를 줍고 있다.
 파헤쳐진 모래갯벌에서 비단조개를 줍고 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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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떠나기 전 인터넷 사이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맛조개는 소금을, 비단조개는 삽을 이용해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를 얻었다. 다른 무엇보다 삽을 먼저 챙기고 몽산포로 출발했다.

물때에 맞추어 도착한 몽산포 해수욕장은 동양 최대라는 말에 걸맞게 3.5km에 달하는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많은 조개들이 저 속에 있을까가 우리들의 관심사였고 부푼 기대를 안고 백사장으로 들어섰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객들은 호미로 백사장을 뒤적이고 일부는 맛소금을 뿌리며 맛조개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겐 호미를 훨씬 뛰어넘는 화력을 지닌 삽이 2자루나 있었던 거다.

공사판을 연상케하 듯 모래갯벌이 심하게 파헤쳐져 있다.
 공사판을 연상케하 듯 모래갯벌이 심하게 파헤쳐져 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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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 땅을 파고 지나면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개를 주웠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이나 기대치와는 달리 많은 양의 조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삽질을 하길 2시간여 우리가 작업을 한 주변은 여느 토목공사 현장을 방불케 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파놓은 곳에 물이 고이자 몸을 적시며 놀고 있다. 형제들이 오랜 작업에 기운이 빠져 쉬자 고향이 강원도인 둘째 형수님이 삽을 들고 나섰다. 이날 강원도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3시간의 작업 끝에 양파자루 1/5정도의 비단조개와 7~8마리의 맛조개를 잡았다. 힘과 장비만 앞세운 초보들을 조개들이 보기 좋게 따돌린 듯했다. 잡은 조개를 2일 정도를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빼야 하지만 여행 일정상 하루만 하고 그냥 구웠다.

해감을 덜 뺀 때문인지 모래가 약간 씹히긴 했지만 직접 고생해서 잡은 것이라 조개속살은 더욱 쫄깃하게 느껴졌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고생을 보상 받는 듯했다.

갯벌체험 객들의 삽질이 환경파괴 주범

파헤쳐진 모래갯벌에 물이 고이자 그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파헤쳐진 모래갯벌에 물이 고이자 그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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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갯벌체험 관광객들 때문에 갯벌 환경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한국일보> 보도가 있었다.

취재 기자는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생태계의 보고인 갯벌이 몸살을 앓고 있다"며 "끝없이 밀려드는 갯벌체험 관광객들이 생태계를 직접 보고 배우며 그 소중함을 느끼기보다는 채취에만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는 이어 "특히 입장료가 없는 갯벌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이 몰려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며 "이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딱딱하게 다져졌고 갯벌생물의 은신처인 바위는 모두 뒤집혔다"고 꼬집었다.

기자는 "아이들은 갯벌생물의 생태를 눈으로 보고 느낀 점을 관찰일기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바닥 곳곳에는 발이 떨어져 나간 작은 게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잠시 후면 죽고 말 것"이라며 걱정했다.

형제들은 기사 내용을 공유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지만 달아오른 얼굴은 감추진 못했다. 자연스럽게 "누가 삽을 준비한 거야"란 말이 나왔고 난 눈을 내리깔고 뒷머리를 긁어야만 했다.

갯벌을 어른이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표면에 살고 있는 어린 생물들은 전멸한다고 한다. 또한 맛조개를 잡기 위해 뿌리는 맛소금은 생태계에 변화를 줘 조개나 게가 살수 없는 죽은 모래밭으로 만들어 버린단다. 우린 삽으로 파헤치기까지 했으니….

갯벌은 죽거나 말거나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삽질을 했던 잘못을 참회하며 갯벌에게 용서를 구한다. 우리가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는 이들이 없길 진심으로 바란다.

3~4시간 동안 잡은 조개가 해감을 빼기 위해 물속에 잠겨있다.
 3~4시간 동안 잡은 조개가 해감을 빼기 위해 물속에 잠겨있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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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혀진 조개를 까먹고 있는 아이들
 잘 익혀진 조개를 까먹고 있는 아이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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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을 함께한 가족들
 2박 3일을 함께한 가족들
ⓒ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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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기름유출 사고로 환경오염에 신음하던 태안, 8월 첫주말에만 22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단다. 태안을 구하려 팔을 걷고 나섰던 자원봉사자들이 이제는 관광객으로 이곳을 찾고 있는 듯하다. 부디 아니온 듯 다녀가시길….

덧붙이는 글 | 충남 태안군 몽산포해수욕장은 수심이 1~2m이내여서 아이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인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소나무숲에선 텐트야영이 가능해 저렴하게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태그:#환경, #삽,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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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이 세 아이가 학벌과 시험성적으로 평가받는 국가가 아닌 인격으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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