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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오성홍기는 어디로 갔나?

 

하늘이 새파랗게 그림을 그리면 만리장성을 가야 한다. 8월 16일 선배랑 차를 타고 베이징 시내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시자즈[西栅子]를 찾았다. 징청[京承]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화이러우[怀柔]현을 거쳐 산으로 난 X005 지방 현(县)도로를 따라 오르고 올랐다. 국도는 G, 성도(省道)는 S로 시작되는데 X로 시작되는 현도는 정말 좁다. 서서히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도 점점 낮아진다.

 

2006년 12월 중순에도 이 길을 지나갔는데 그때의 두자춘[度假村] 분위기가 아니다. 당시는 차 번호를 가린 러브호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산 중턱 방갈로도 여름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거리에는 말을 타는 사람도 있고 사륜차를 타고 놀기도 한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만든 풀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뜻의 나리(那里)라는 곳인데 지명이 아주 재미있다.

 

한계령을 넘어가는 고개만큼 가파른 길을 꾸불꾸불 돌아가면 윈펑[云峰]산 옆 산길을 넘어가는 360도를 두 번이나 연이어 도는 길이 있다. 정말 돌고 돌아가는 산길이다. 계곡의 일곱 번째 다리인 치다오허[七道河]에서 왼편으로 난 시자즈생태원 표지판을 따라 다시 10여분 들어가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베이징 시내에 그 많던 오성홍기가 전혀 걸려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도 분명 베이징 시인데 화이러우부터 시작해서 단 하나도 붉은 깃발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올림픽과 완전 무관한 딴 세상 같다. 하루 종일 단 하나도 못 봤다. 만리장성 혜택 못 받고 사는 산골마을에 올림픽이라고 걸려 있는 오성홍기 사진을 꼭 찍으리라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던 셈이다.

 

 

자연 냉장고가 따로 없었다

 

입장료도 받고 주차 비용도 받는다. 비싸지는 않지만 미개발장성이라고 써놓고 돈을 받는 것도 좀 이상한데 2005년부터 관광객들이 조금씩 찾기 시작하면서 쓰레기 청소하고 관리하는데 힘이 드니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차를 세운 후 언덕배기에 농가식당으로 올라갔다. 아침도 거르고 와서 장성을 오르려면 배를 채워야 했다. 성이 조[赵]씨가 주인인가 본데 집 벽에 잉여우[影友]의 집이라고 크게 써있다. 잉여우는 영화 팬이라는 뜻이니 주인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뜻인지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멋진 집이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마당에는 말린 옥수수를 대롱대롱 걸어뒀고 호박도 넝쿨째 매달린 산골 농가의 집 그대로 토속적인 분위기이다. 게다가 마당에서 산을 바라보니 능선마다 장성이 이어져 있고 봉우리마다 망루이면서 봉화대(烽火台)가 봉긋하게 솟아있는, 영화 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마당 가운데 구멍 하나가 뚫려진 채 문이 열려있어서 보니 창고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맥주나 음료수, 수박이 가득하다. 야외 자연 냉장고가 따로 없었다. 정말 시원한 얼음창고가 안마당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보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다.

 

마을을 둘러보는데 옥수수 창고가 많다. 창고 옆에 있는 공동 화장실 입구에 남녀(男女)를 멋지게 새겨 구분했고 만리장성 흑백사진을 걸었다.

 

 

"독도 입고 만리장성 오르시죠"..."멋진데!"

 

점심을 먹고 선배에게 옷을 하나 선물했다. 바로 '독도는 한국의 아름다운 섬입니다'라는 글씨가 멋지게 새겨진 예쁜 셔츠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이 셔츠를 만든 회사 팀장이 몇 벌 선물한 것인데 '만리장성을 독도 입고 오르시죠' 했더니 '멋진데' 하며 바로 갈아입었다.

 

순박하게 생긴 주인과 사진 한창 찍고 장성까지 올라가는데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말 듣고 가볍게 출발했다. 예전에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던 곳인데 최근에는 사람들이 꽤 찾는다고 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은 어젯밤에 와서 하루 숙식을 하고 장성을 오른다고 한다. 한 바퀴 종주를 한다는 것인데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숙박비가 80위엔으로 생각보다 약간 비싸다고 했더니 주인이 이런 농가체험을 하는데 돈이 문제냐고 웃는다. 맞는 말이다. 생생한 산골의 농가마을, 닭도 잡고 산채나물로 묻힌 안주에 술 한잔하고 하루 묵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징에서 온 사람들에게 왜 여길 왔느냐고 물으니 "바다링[八达岭]이나 스마타이[司马台], 쥐융관[居庸关]이 무슨 만리장성이냐, 진정한 장성(真正的长城)은 여기"라고 힘주어 말한다. 장성 개발을 하면서 옛날 벽돌 다 치우고 길도 정돈하고 풀과 꽃도 다 메말라 버린 관광지이지 장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올라가니 '나로부터 장성보호'라는 말과 함께 '미개발장성 등산금지'라고 또렷이 써 있다.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흔적인데 등산 금지와 보호가 서로 모순이라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옥수수 밭을 지나 계곡 물이 졸졸 흐르는 길을 따라 가니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등산로가 있는데 길게 자란 풀들이 계속 팔과 다리를 긁어댄다.

 

우리나라 지도 속에 사뿐 들어앉은 훈민정음, 독도에 위치한 태극문양이 예쁜 독도가 새겨진 선배 등을 보며 뒤에 따라 가는데 갑자기 발 아래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독거미를 발견했다. 몸통 새까맣고 흉물스런 녀석이 등산로를 막아 섰으니 등골이 오싹하다.

 

연한 하늘색 빛깔이 살짝 감도는 엉겅퀴처럼 생긴 꽃에 벌 하나가 대롱 매달려 꿀을 빨고 있다. 독거미에 놀라 혹시 벌도 독충인지 확인하고서야 사진을 찍었다.

 

그야말로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30분이면 된다더니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 우리도 꽤 산을 잘 탄다고 하는데 계속 오르막 길을 오르다 보니 숨이 턱까지 치고 올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무 그늘에 가려 어두침침했는데 서서히 햇살이 보이는 것이 정상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장성 벽이 보이고 허물어져 가는 벽을 타고 오르니 시야가 확 넓어진다.

 

잠시 땀을 닦고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피니 그야말로 감동, 환상,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자칭 만리장성 박사인 선배도 생전 이렇게 멋진 장성은 처음이라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이 장성은 명나라 장성이다. 진시황 이전 연(燕)나라 등 춘추전국 시대부터 쌓기 시작한 장성은 명나라에 이르러 대대적인 보수와 확장 공사를 단행했다.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명나라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늘 걱정했던 것이다.

 

사방 어디에나 능선을 따라 장성이 이어져 있다. 시자즈 장성에서는 주변 산세와 장성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장성 길을 따라 옆의 가파른 능선으로 옮겨갔다. 옛날 벽돌도 그대로 이고 키만큼 자란 풀을 헤치고 갔다. 장성에 이렇게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줄도 몰랐다.

 

선배는 산하이관에서 시작된 장성이 베이징 외곽으로 오면서 서북방향과 서남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장성이 바로 저곳이라고 지팡이로 알려줬다. 그리고 스마타이, 졘커우[箭扣], 바다링, 쥐융관, 진산링[金山岭]을 비롯해 생소한 이름의 장성들을 줄줄이 열거한다.

 

이곳은 하늘을 오르는 계단이라는 톈티[天梯]이며 '매도 날아오르다 나자빠진다(鹰飞倒仰)'는 졘커우 장성의 북쪽 한 자락이라고 알려준다. 한 폭의 산수화를 놓고 산봉우리마다 이름을 만들 듯 한꺼번에 장성을 이렇게 꿰뚫어볼 수 있다니 정말 멋진 곳에 왔다.

 

이 높디높은 능선을 따라 망루에 앉아 '독도는 우리 땅'이라 외쳐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라. 선배나 나나 흰색바탕에 수놓은 독도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장성이 아주 잘 어울린다.

 

온 산천을 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데 선배가 이대로 내려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다. 그냥 내려가기 아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성을 따라 종주를 하기로 했다. 30분 정도 올랐다가 내려올 요량이었는데 장장 5시간 동안 장성 능선을 타게 될 줄 몰랐다. (계속)

 

▲ 미개발장성을 오르다 본문기사 참조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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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리장성, #시자즈생태원, #베이징,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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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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