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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는 조순호

홋카이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 과정까지 끝내야 했던 조순호의 일본 체류 기간은 길었다. 그런데 그 5년 정도의 세월 동안 조순호가 나민혜를 만난 것은 두 차례였다. 두 번 다 나민혜가 삿포로에 예고 없이 찾아와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처음 만남은 나민혜가 박우진과 결혼하기 훨씬 전이었다. 나민혜는 조순호에게 자기의 그림이 일본에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남자들, 이를테면 일본 학생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에 대하여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순호는 나민혜의 말을 가슴 졸이며 끝까지 들었다. 혹시 나민혜의 입에서 김문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나민혜는 끝내 김문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녀는 조순호가 해 주는 밥을 맛있게 먹고, 조순호가 안내한 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카페에서도 자기 주변 남자들 얘기와 그들과 함께 간 레스토랑과 그들과 어울린 파티 얘기를 주로 했다. 조순호는 김문수의 소식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왠지 막연히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순호는 나민혜가 김문수와 결혼하리라는 것은 의심치 않았다. 다만 나민혜의 유학 생활이 너무 분주하고 실속이 없어 보여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런 나민혜를 김문수가 용납하는 것을 보니 김문수는 정말 나민혜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김문수도 나민혜 때문에 곤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수다스럽게 하룻밤을 묵은 나민혜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삿포로를 떠났다. 그녀는 조순호에게 돈을 좀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조순호는 당장 빌려줄 만한 돈이 없었다. 그녀는 며칠 후면 집에서 돈이 온다고 말했다. 물론 그녀의 학비와 생활비였다.

그러나 며칠 후 조순호는 나민혜에게 기꺼이 돈을 부쳤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충당하리라고 작정한 뒤였다. 사실 아르바이트는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전혀 하지 않던 그녀였다. 조순호가 나민혜에게 돈을 보낸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이웃에서 친구로 지내온 나민혜에 대한 우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조순호가 돈을 부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다른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인 김문수의 여자가 돈 때문에 구차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두 번째에도 나민혜는 불쑥 조순호를 찾아왔다. 조순호가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아울러 그때는 나민혜와 박우진의 결혼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민혜의 다채로운 남자 물색이 일단락된 정황이었다. 그녀는 매우 쾌활해 보였지만 예전처럼 들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 상대자인 박우진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민혜는 자기의 결혼 사실 자체를 조순호에게 아예 발설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밤기차를 타고 홋카이도 남동 해안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섬의 동남단에 있는 우라카와까지의 왕복표를 끊었다. 태평양을 끼고 달리는 밤기차 안에서 그들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서로의 부모들 일화와 얼마 전 돌아가신 조순호 할아버지의 추억 등을 반추하며 옛정을 되새겼다.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조순호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 하는 나민혜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민혜는 원래 차분하지 않은 친구였음을 상기하고는 대수롭게 보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민혜는 뭔가 미진한 것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눈치였다.

조순호는 혹시 김문수의 신변에 불행한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왈칵 불안해졌지만 그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다. 나민혜도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빌려간 돈 얘기도 없었다.

나민혜가 떠나고 난 다음, 조순호는 수상하다는 생각을 영영 지울 수가 없었다. 대관절 나민혜는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던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나민혜가 자기를 만나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기차 여행도 자기가 제안하니 소극적으로 따랐을 뿐이었다. 동경에서 삿포로까지는 기분 전환 삼아 오기에는 너무도 먼 길이었다. 3일 낮밤은 부지런히 와야 하는 길이었다.

‘혹시 민혜가 나에게 할 말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조순호의 의문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이제 김문수를 못 만날 이유가 없어

의사가 된 조순호는 귀국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관연락선의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건너편 좌석에 앉아 조순호를 힐끗힐끗 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조순호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국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 가면 조용한 동네에 작은 병원을 내고 싶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서울에 가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가족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몇몇 일가 친척집에도 인사를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는 가까운 친구 몇을 만나야 할 것이었다. 그녀는 나민혜를 생각했다. 아마 그녀는 김문수와 결혼해 살고 있을 터였다. 조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민혜를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를 보고 있던 여자가 조순호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짙은 화장과 부서질 듯한 머리 모양 때문에 그 여자를 못 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순호에게 반갑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쉬고 있던 일본인 승객들이 그녀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조순호는 그녀를 데리고 갑판으로 나갔다. 그녀는 나민혜의 언니 나윤혜였다.

바다 바람이 조순호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나윤혜는 휘날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나윤혜는 조순호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녀는 정규 의과대학에서 전문의 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순호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 우리 민혜 결혼한 거 알지?”
“...했군요?”
“응. 부산에서 살다가 얼마 전 서울로 이사 왔어.”
“부산이라고요?”

나민혜의 결혼 소식을 들은 조순호는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민혜는 김문수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혹과 충격에 휩싸여 들었다. 하지만 조순호는 자세한 경위를 묻지는 않았다. 언니인 나윤혜가 자세한 정황을 알 리도 없을 뿐 아니라 김문수 이야기를 나윤혜에게서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민혜가 두 번째 찾아왔을 때 김문수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기가 나민혜에게 오랫동안 속아오지는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지펴 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눈앞이 훤히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친구인 나민혜가 김문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김문수를 못 만날 이유도 없어진 것이었다. 수평선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 가서 하기로 한 일들은 모두 무효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울에 가면 무엇보다도 당장 김문수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동요하는 일본, 권력 핵심의 동향

김영세는 아사히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일본 권력 핵심의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이 자력으로 독립할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었다. 그는 필경 일본 제국주의에도 내부 분열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많은 침략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이지만 그곳이라고 해서 양심 세력이 없을 리가 없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는 언제나 방법론상의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만주사변이 터져 전선이 대륙 전체로 확대되고 조선 독립군과 중국의 국민군 · 공산군이 함께 패퇴하고 있었지만 김영세는 사태를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일본이 드디어 자멸의 무리수를 범하기 시작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신문의 기사에서 일본 권력 내부의 혼란을 읽고 있었다.

김영세가 읽은 것은 일본 내각 요인의 암살 기사였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일본의 내각은 힘을 잃고 있었다.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에 이어 해군 장교들까지도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내각은 그들 세력을 발본색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연히 군부에 빌미를 주었다가는 언제라도 반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내각에서 육군이나 해군의 의도에 반하는 정책을 집행하려는 총리와 각료는 어김없이 암살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각이 군부의 눈치를 보며 외교 노선을 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전쟁 노선에도 대립이 있었다. 육군은 친독 세력이었고 해군은 친 영· 미 세력이었다.

일본 내각은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한 것으로 전쟁을 일단락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였던 영국과 미국의 추이를 보며 차후 대외 관계를 정하자는 노선을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만주국 보호를 빙자하여 간도에 파견된 관동 육군은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호전 군사력이었다. 그들이 정부의 훈령을 묵살하고 만주 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전면적인 대 중국 전쟁이 개시된 것이었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를 비롯한 관동 육군 수뇌부는 봉천 외곽에 있는 류타오거우에서 스스로 공들여 건설한 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해 버렸다. 물론 이것은 사건을 중국 측 소행으로 씌워 확전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관동군은 만주와 외몽고 그리고 화북까지 점령지를 넓혀 갔다. 당연히 일본의 호전적인 병력이 소련 군사 주둔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교전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북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대신 만주 지배권을 확실히 못 박는 선에서 중국과 휴전을 하려고 했다. 일본 육군본부는 이에 반대했다. 피 흘리고 싸워 화북까지 쳐 올라간 제국 군대의 대화혼(大和魂)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이 그려집니다. 작가 김갑수는 최근 전작 장편 <오백 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태그:#홋카이도, #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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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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