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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의 과거와 나윤숙의 <렌의 애가>

김수임이 닷새 만에 이강국의 조끼를 완성한 것은 일주일 후로 예정된 두 번째 면회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남은 이틀 동안에 이강국의 털실 양말을 더 짰다. 나윤숙은 이강국의 면회로 들떠 있는 김수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강국은 첫 면회 때나 다름없이 활기차 있었다.

"조끼와 양말 고맙습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나윤숙은 이강국과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사모님께도 한 번 가보겠습니다."

그때서야 김수임은 이강국이 유부남인 줄을 알게 되었다.

이강국의 처는 셋방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왔다가 병석에 눕게 된 것이었다. 부모가 정해 준 대로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여자였다. 아이가 둘 있는데 시집에서 맡아 키운다고 했다. 그녀는 기침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강국이 유부남이라는 것을 김수임은 조금도 괘념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 처자가 있는 것을 안 김수임은 오히려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윤숙은 그런 김수임이 다소 안타까웠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김수임에게는 생각보다 더 맹하면서도 순수한 면이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사실 나윤숙은 김수임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김수임에게는 혼인 이력이 있었다. 그녀는 10대 초반의 나이에 팔려가 머리 나쁘고 폭력적인 소년 신랑과 4년 동안 같이 산 과거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로서는 말소하고 싶은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런 과거를 극복하기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녀의 두뇌는 명석한 편이었고, 외모와 심성이 모두 보통 이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에 없이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여전 영문과에 다니게 된 그녀는 범상치 않은 과거를 쉽사리 발설할 수가 없었다. 달리 보아 발설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가 타인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로서는 그 과거를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나윤숙은 이강국에게 마음이 팔려 있는 김수임이 조금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배에게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묘하게도 나윤숙 역시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학교를 마치고 만주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에서 1년 간 교편을 잡게 되었다. 저널리즘을 선망했던 그녀는 만선일보의 기자를 겸임하면서 틈나는 대로 시를 썼다. 그녀는 용정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언니를 알게 되었으며, 다음으로는 그 언니의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녀의 끈질긴 연서를 받은 김영이라는 남자는 그녀보다 열 살 이상 많았는데, 세 자녀의 아버지였고, 의사로서 용정에서 이름난 제창병원의 원장이기도 했다.

경성에 돌아온 나윤숙은 김영과의 사랑을 제재 삼아 서간집을 발간했다. 이미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시집을 한 권 내놓은 그녀였다. 서간집의 제목은 <렌의 애가>였는데, 그것은 순결한 처녀가 중년 남성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렌(Wren)은 아프리카의 숲 속에서 혼자 우는 새의 이름이라고 했다. 렌은 작가 또는 시적자아를 비유한 이름임이 틀림없었다. 렌에게 연서를 받는 남성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아마도 예수의 제자 베드로에게서 따온 이름 같았다.

나윤숙이 보기에 베드로는 진리를 직선적으로 탐구하는 대담성과 스승 예수를 부인하는 비겁성을 동시에 갖춘 남성이었다. 아마도 렌은 사랑했던 유부남 김영에게 그런 이율배반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훗날 나윤숙은 어느 잡지와의 대담에서, 뜬금없이 시몬은 식민지 시대의 남성상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몬,
어제 석양엔 당신의 아기가 꽃을 가지고 와서, "아주머니, 선녀 얘기." 하면서 졸랐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몬의 형상과 같이 생긴 이 소녀를 오랫동안 제 곁에 두는 것으로 마음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간단한 이야기를 해 주고 아빠 소식을 물었습니다.

저는 아기의 눈에서 음성에서 당신을 만나 봅니다. 당신이 맘속에 동경될 때 이 아기의 얼굴을 대함으로 슬픔이 제거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어머니가 내게 오면 야단한다는 핑계로 오래 있지 않고 달아납니다.

제 영혼의 친구, 시몬,
귀하신 아내의 간곡한 충고! 생명과 청춘, 건전한 사회의 의무를 위해 시몬을 가까이하지 마라시던 그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향기로 채워졌던 시몬의 뜰에 우울이 침입한다 할 때, 저는 아무 대답 없이 울었습니다. 계획 없이 일어난 생의 파랑이 제 영혼을 찢기 시작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굳세게 단념한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믿고 아무 불안도 가지심이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임주호의 황국신민서사와 한국인 공민 교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백수 신세로 전락해 버린 임주호는 가족에게도 민망했지만,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열넷의 나이에 고보생이 되었을 때, 기대와 희망을 품고 학교에 갔던 일을 생각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4월 1일이면 봄이 어지간히 무르녹아 있을 때였다. 그는 새로 맞춘 교복을 단정히 차려 입고 새 구두를 신었다. 그는 생동하는 봄기운을 느끼며 학교에 갔다. 일본인 순사들도 그를 보는 표정이 공손해 보였다. 그는 제복이 존중 받는 시대에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보 교과서들은 좋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고 책 표지도 두꺼웠다. 그는 명문당이라는 문방구에서 학용품을 구입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새 책들을 보며 공부에 대한 의욕을 느꼈다. 보통학교와 달리 과목마다 다른 교사가 수업을 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학급 수업을 담당한 15명 정도의 교사 가운데 한국인은 둘뿐이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는 한 교실의 지정된 책상에서 일주일 내내 보내야 하는 삶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교복을 입은 50명의 학생이 똑같이 삭발한 머리로 검은 흑판을 하루 종일 마주해야 했다. 매일 8시에 수업이 시작되었고 오후 3시 20분이면 어김없이 끝났다.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면 모두가 기립하여 인사를 했고, 50분 수업이 끝나면 역시 모두 기립하여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정확히 10분 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매일 조회 때마다 5개조의 황국신민서사를 복창했다.

"우리는 덴노의 충실한 신민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합쳐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고 단련하여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매월 첫 월요일에는 전교생이 남산에 있는 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일본인 신관이 주문 같은 것을 읊조리는 동안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임주호는 누구에게 경배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타인들의 신에게 절을 해야 하는 자신이 싫었다.

교사들은 신도에 관해 끊임없이 강의했다.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말에 그는 넌덜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작문 시간에, '왜 일본이 신의 나라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써내기도 했다. 그는 무려 매주 월요일 공민 시간이면 신도 강의를 들어야 했다.

공민 과목은 다른 모든 과목을 합친 것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강의를 교장이 직접 담당했다. '일본의 국체와 본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30여 쪽의 소책자를 교장은 1년 내내 강의했다. 당연히 반복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지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독특하고 우월하다. 그것은 일본이 신국이며 현인 신인 덴노가 조선인을 포함한 백성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군은 덴노의 깊은 사랑에 감동해야 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공민 교사 요코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좌선을 시키는 일이 많았다. 그는 대아를 위해 소아를 죽이라고 근엄하게 말했다.

"제군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으면서 불타는 쇳덩어리를 삼키는 정도의 담력이 있어야 한다."

4학년이 되자 교장은 새로운 공민 교사를 소개했다. 그는 교장의 심복이었는데 놀랍게도 조선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집에서도 일어를 쓴다고 했다. 그의 조선 이름을 아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교장에 의해서 한국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칭송되었다(그는 훗날 남한에서 법무부 고관을 지냈다).

덧붙이는 글 | 등장인물 나윤숙은 실존인물 모윤숙과 거의 같은 인물입니다.



태그:#렌의 애가, #황국신민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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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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