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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회견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회견은 저녁 8시로 잡혔다. 장준하는 선전부장 엄항섭을 도와 김구의 회견문 원고를 작성했다

27년 간 꿈에도 잊지 못했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유명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연합국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중략)

작금의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승리를 얻은 원인은 연합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호상 단결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금일 전쟁을 영도한 미국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연합국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협력한 연합국에 대해서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중략)

나와 나의 동지는 각각 일개 시민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맡아 가지고 27년간 노력하다 결국 이와 같이 대면하게 되니 한편으로 송구한 마음이 앞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시지 아니하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하여 주시니 감격의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지는 오직 완전한 통일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해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는 길이라면 불 속이든 물 속이든 주저 없이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구에 또 소련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다 함께 그 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완전히 자주 독립하는 신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합시다.

미국에서 귀국하는 임수경

김구가 기자회견을 하던 그 시각에 임수경은 뉴욕 발 동경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자주 시계를 보았다.

그녀는 며칠 전 로스앨러모스에서 프린스턴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제 때 알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가기 전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결과만 알려 달라'고 했던 전보가 아버지의 마지막 자취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동생 주호가 노동수용소 생활을 무사히 견디고 집에 와 아버지가 하던 호텔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당장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와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해방이 안 되었더라도 조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된 마당에 미국에 눌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비행기 시간을 잡는 데 몇 달이 흘러버렸다.

사실은 박사 학위를 마쳤을 때 갔어야 할 조국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전황이 험악했고 조국에서 들리는 소식들도 끔찍하여 섣불리 귀국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로스앨러모스 행을 제의받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원자폭탄 덕분에 일본의 항복이 빨라져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살상 무기를 만드는 일에 자신이 일조했음을 부끄러운 경험으로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귀국해서 동생을 만나보고 아버지가 벌이던 사업을 동생과 함께 수습할 예정이었다. 동생 주호도 빨리 귀국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이나 보냈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에게 그동안의 관심과 배려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베어드에게도 전화로 자신의 귀국을 알렸다. 뜻밖에도 베어드는 한국 근무를 지원해 놓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임수경에게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임주호를 찾아가는 김수임

이강국은 김수임을 찾지 않았다. 김수임은 자기를 찾지 않는 이강국이 원망스러웠다. 가끔 그녀는 건준의 간부로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밤마다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일에도 싫증이 났다. 원래 그녀는 환자들이 우글거리는 병원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 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도호텔에 가 보기로 했다. 그녀는 서울역에서 만난 임주호를 호텔의 직원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호텔 카운터에 가 임주호의 이름을 댔다.

"근무처는 잘 모르는데요."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찾는 분 이름이 무엇인지."

"이곳에 와서 임주호를 찾으면 된다고 했는데, 혹시 그 사이 그만 두셨나요?"

카운터 직원은 빙긋 웃더니 송수화기를 들었다.

"카운터입니다. 김수임이라는 여자 분이 사장님을 찾아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김수임은 깜짝 놀랐다. 그 소탈하고 온유해 보이는 젊은 청년이 사장일 리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군요."
"전화 받아 보시지요."

김수임은 송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분명히 해방된 날 만났던 임주호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이리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커피숍으로 갈까요?"
"… 어떤 게 편하신지요?"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얼마 후 임주호가 커피숍으로 내려왔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지나가는 길에 한 번 들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일 줄은 몰랐어요."

"나윤숙씨가 수임씨를 잘 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 어떻게 윤숙 언니를 아시죠?"

"몇 년 전에 같은 독서회 회원이었습니다. 저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요. 나윤숙씨는 며칠 전 이곳에 왔다 갔습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그 독서회 얘기는 들었어요."

김수임은 임주호가 독서회 회원이었다면 이강국을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임주호에게 이강국을 아느냐고 물었다.

"저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큰일들을 하고 있어요. 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지요. 나윤숙씨도 많은 일을 했고요. 그리고 독서회원은 아니지만 장준하라고, 그는 일본 유학 시절에 사귄 친구인데, 김구 선생 일을 돕고 있어요. 이강국 선배야 학창시절부터 나라를 위해 일했지요."

임주호는 김수임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얼굴에 음영이 지는 순간 임주호는 김수임을 처음 보았던 아주 먼 옛날의 일을 불현듯이 떠올리게 되었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민며느리로 팔려 와 남편에게 매 맞고 길가에 실신해 있던 소녀가 틀림없었다. 임주호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고향이 개성 아니냐고 물을 뻔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



태그:#김수임,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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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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