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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이 순수했는지는 독립된 후에라야 안다

하지만 임주호는 김수임의 과거를 안다는 표시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독서회에서 본 것 같다고 꾸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다고 했더니 바로 독서회에서 뵈었나 보군요?"
"저는 독서회 회원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윤숙 씨와 친했다면 한 번 쯤은 그 독서회에 나오셨을 테니까요. 아, 맞아요. 명동 다방에서 뵈었던 것 같군요."

김수임은 정확한 기억이 없었지만,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윤숙과 명동 다방에 자주 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수임도 임주호의 얼굴이 낯익은 이유를 나름대로 납득하게 되었다.

"큰 호텔을 운영하시는 일이 어렵지 않으세요?"
"몇 달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할 생각도 없고요. 사실은 제 누나가 다 해주고 있습니다."

"누님이 능력 있으신 모양이죠?"
"그렇지도 않습니다. 내 누님은 학자입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할 수 없이 맡고 있는데 임자가 나서면 팔아 버릴 생각입니다."

"나윤숙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성적 감정을 묻는 겁니까?"

"말씀을 들으니 그것도 궁금하군요."
"이성적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일제 말에 언니가 했던 일들은요?"
"개인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런 일을 하고 난 후가 더 중요하지요."

"자숙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착오를 할 수 있지요."

"이강국 선생은 어떻게 보시나요?"
"열정과 실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역시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그 분은 독립 운동을 하셨잖아요?"
"누구나 살다 보면 뜻있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과연 그 분의 독립운동이 순수했는지는 독립된 후에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김수임은 임주호의 권유대로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미국인 양모 밑에서 성장한 그녀는 양식을 먹는 데 익숙했다. 그들은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임주호는 김수임의 성장 과정이 궁금했다. 그녀가 어떻게 역경을 헤치고 이화여전을 졸업할 수 있었으며 멀쩡한 직업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임주호는 그런 것을 일절 묻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고 친절하게 일관했다. 김수임은 임주호에게는 한국의 보통 남성과 다른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의 신상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주장으로 남을 억압하는 일이 없었다. 유복한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마음이 쓸쓸해졌다.

"참, 누님이 학자라고 하셨지요?"
"네. 최근에 귀국했습니다."

김수임은 입을 쫑긋 오므리며 말했다.

"일찍부터 미국에 가신 여성 선각자시군요?"
"미국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일을 하다 귀국했어요."

"어머나! 그렇게 훌륭한 여자 분이 우리 한국에도 있었나요?"
"훌륭한지는 잘 모르겠고요."

"일본을 항복하게 만들었으니까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민간인이 15만이 넘는답니다."

김수임은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원자폭탄 투하를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교회 목사 중에는 오히려 그것을 예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시 교회나 성당에 다니세요?"

임주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수임이 보기에 임주호의의 누나도 놀랍지만, 임주호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민족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 그것도 아니면 그저 속물일 뿐이라고 알았는데, 임주호는 이 셋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주호 같은 사람이 이강국보다 오히려 더 격조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 늦어지자 임주호는 호텔 차량에 김수임을 태워 전송했다.

임정요인을 박대하는 미군정

장준하는 미국의 처사에 대해 내심 분노하고 있었다. 미국은 임정요인 2진 환국단 수송에  군용 트럭을 내보냈다. 추운 겨울에 트럭을 내보내는 것은 임정요인들을 미군 졸병만도 못하게 취급한 것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1진 귀국 때에도 장갑차를 내보내 테러범 실고 오듯이 한 그들이었다. 아무리 개인 자격의 귀국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뭔가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임정의 나머지 가족들이 올 때는 엘에스티 화물 함정에 일반인들과 섞어서 태우고 왔다.

장준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들은 비록 임정에서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그리고 오래 한 사람들이었다. 공식 직함이 없었기에 어느 면으로는 임정의 국무위원들보다 더 순수하고 선량한 애국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1진으로 귀국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임정은 검사를 할 것도 없어. 모두들 거지라서 짐도 없으니까."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정정화는 상해에서 화물 함정을 타고 왔다. 그녀는 미군 장교들이 노골적으로 임정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부산에서 내린 그들에게 미군 병사들은 소독을 한답시고 디디티를 마구 뿌렸다고 했다. 그들은 화물 열차에 실려 마른 빵을 먹으며 3일 만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분명히 미국은 임정을 의도적으로 박대하고 있었다.

'나야 고작 2년 중국에 있었다. 정화 아주머니 같은 분은 거의 평생 임정을 위해 일하셨는데….'

장준하는 임주호가 남기고 간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장형, 이런 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모두 다 허망한 몸부림들이야."

귀국하고 나서 얼마 동안 장준하는 자신이 독립국가 건설의 핵심 자리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으로 임했다. 그는 일본에서 중단한 신학 공부도 뒤로 미룬 채, 김구의 일을 도왔다. 김준엽은 장준하와 달리 중국에 남아 남경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장준하는 조국이 독립되는 것을 뜬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는 공부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을 신이 자기에게 부하한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김구 주석을 위해 일하다가 조국이 독립하면 정치에서 손을 떼고 그 때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내심 마음을 정해 놓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임주호의 말은 그런 노력들이 모두 허사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임주호에게 비범한 수학적 계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런 정세 판단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렸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임주호의 판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임주호는 예나 지금이나 골방에 처박혀 독서로 소일한다고 했다. 그는 국제 정세와 제국주의 역사에 관한 서적을 주로 읽는다고 했다. 모두가 전면에 나서 활동하며 실적 내기에 급급할 때, 그는 혼자서 내실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장형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일본에 가기 전 이강국 선생이 주도하는 독서회에 나갔었잖아."
"이강국 선생을 지금도 만나나?"

"아니야. 하지만 이제 조금 더 지나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게 될 것 같아서 조만간 한 번 만나 볼까 해. 그래도 그 독서회는 순수했고 열정이 있었지. 나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 그래서 그들을 한 번 초대할까 해. 그러니 장형도 와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보기에 이강국 선생은 자네와 이념은 다를지라도 결국은 같은 유형의 인물이야."

"무슨 뜻이지?"
"순수하다는 말이지."

임주호는 정겹게 웃더니 장준하의 어깨를 짚고 일어났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



태그:#이강국,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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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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