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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은 양모 캐롤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병원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었다."

캐롤은 김수임에게 반도호텔에서 이화여전에 직원 추천을 의뢰했다고 했다. 영문과 출신으로 회화가 가능하며 용모가 단정한 직원을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반도호텔이라고요?"

김수임은 임주호를 생각하며 물었다.

"미군정에서 그 호텔을 인수한 모양이더라.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겠고 젊은 여성 재미교포가 주인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김수임은 임주호의 누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재미교포가 아니고 미국에 유학 갔다 온 물리학 박사라고 알고 있어요."

캐롤은 김수임에게 여러 가지 당부의 말을 했다. 주로 정과 사랑에 약한 김수임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네가 외국 남성들 속에서 잘 견딜까 걱정이 된다. 마치 사자굴에 보내는 심정이란다. 하지만 너는 똑똑하고 사회 경험도 3년이나 쌓았으니까 잘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미군 고위층 출입이 잦은 곳이니 매사에 신중히 처신해야 한다."

미군정 행정고문 베어드

김수임은 하얀 실크 머플러를 하고 면접을 치르기 위해 반도호텔로 갔다. 그녀는 언제나 호텔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호텔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직원도 대부분 미국인인 것 같았다.

'임주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지배인실 문을 노크했다. 영자 신문을 읽고 있던 서양인이 그녀를 맞았다.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나는 지배인 부시입니다."

부시는 큰 키를 구부리며 김수임에게 악수를 청했다. 잠시 후 중년의 미국인이 펜과 메모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인사부장입니다."

김수임은 단정히 목례했다.

"이력서를 보니 고향이 개성인데 언제 서울로 왔으며 영문과를 택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김수임은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라 움찔했다. 그런 것을 물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볼썽사나운 과거를 드러내지 않는 답변 방식을 알고 있었다.

"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제가 서울로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 목사님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미국인 양모 캐롤 여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영문과 교수이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과 대학에서 익힌 영어로 3년 간 세브란스 병원에서 통역 일을 하며 근무했습니다."

부시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영어 발음이 좋은 김수임에게 호감이 갔다. 게다가 외모와 체격이 모두 호텔 근무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언제부터 근무하실 수 있습니까?"
"병원 일의 인수인계가 끝나야 하므로 지금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부시는 자기 명함을 김수임에게 건넸다. 김수임은 합격증을 받는 기분으로 명함을 받았다. 그녀는 호텔 문을 나서며 찬송가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흘 후에 호텔로 출근했다. 부시는 그녀를 미군 장교에게 인사시켰다.

"군정 행정고문님입니다."

김수임은 장교의 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잘 생긴 미군이었다. 미군 장교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베어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김수임입니다."
"미스 김은 제가 본 동양 여성 중 두 번째로 매력 있는 분입니다."

김수임은 부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웃으며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이럴 때 첫 번째 여성을 물어봐야 하는 것인지요?"

김수임의 말을 엿들은 베어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한국 여성들은 모두 똑똑하다고 말했다.

2년 만에 김수임을 찾아온 이강국

이강국이 김수임을 찾아온 것은 여름과 가을이 다 지나서였다. 사무실에서 퇴근 준비를 하던 그녀는 이강국의 전화를 받았다.

"수임아, 나 414호에 있어."

김수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2년 동안 연락조차 없던 그를 그녀는 무수히 원망하며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제 연락이 온다고 해도 만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굳은 마음은 이강국의 음성을 듣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이강국은 미군정 수사기관에 쫓기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 경찰에 쫓겼던 그가 미군정에도 쫓기게 된 연유를 상세히 알지 못했다.

"쫓기기 않을 때에는 수임이를 잊어먹고 있다가 쫓기게 되면 할 일이 없어지니까 찾아오시는군요?"

그녀는 늘 쫓겨 다니며 사는 이강국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이강국은 안쓰러워하는 김수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빙긋 웃었다.

"옛날 편찮으셨던 사모님과는 지금 같이 사시나요?"
"서양식으로 말하면 별거 중이라네. 내 생활이 유랑 아니면 감옥살이인데 어느 여자가 붙어 있겠어. 나는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지."

김수임은 가슴이 저렸다. 평소에도 불쌍한 사람을 보거나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지 돕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였다.

'내가 이 불행한 남자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김수임이 아무 말도 안 하자 이강국이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수임이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을게."

김수임은 이강국의 꺼칠한 턱밑 수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난 번 폐렴은 제대로 치료하신 건가요?"
"완쾌된 것 같아. 하지만 요즘은 마음의 병이 도졌어."
"물론 저 때문은 아니시겠지요?"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



태그:#김수임, #베어드,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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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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