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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호의 초대에 응한 이강국과 장준하

임주호는 반도호텔 꼭대기 층의 한 방을 개인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것은 호텔을 미국에 넘길 때의 매도 조건이었다. 그의 누나 임수경이 제안한 것이었다. 물론 임주호는 사양했었다.

“아버지 사업 정리도 남아 있고 게다가 남자가 집무실이 없으면 안 된다.”

임주호는 임수경이 구해다 주는 외국 서적과 신문, 잡지를 무수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독서회 회원들과 장준하를 정식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초대장에는 옛날 독서회를 하던 기분으로 한 번 만났으면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대에 응한 것은 이강국과 장준하뿐이었다.

나윤숙은,  전화로“내가 무슨 낯으로 그곳에 가겠어요?”라고 쓸쓸히 말하더니, 나라가 더 좋아질 때 만나자고 했다.

임주호는 이강국과 장준하에게 누나를 소개했다. 그들은 임수경이 미국에서 공부한 물리학 박사라는 사실에 조금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임수경은 두 청년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관상을 아주 중시하는 편이었다. 다소 촌스럽기는 해도 열정적이며 착해 보이는 두 젊은이가 동생의 친구라는 사실이 그녀는 흐뭇했다.

임수경은 로스앨러모스의 일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이강국이 공교롭게도 그와 관련된 말을 먼저 꺼냈다.

“우리나라 여성 중에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아시는 분인지요?”

임수경은 선뜻 놀랐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는지요?”
“제가 아는 여성이 있는데, 그녀가 미군 장교에게 들었다고 하더군요.”
“크게 기여한 것은 아니고 연구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준하는 임수경이 바로 그녀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미국 유학에 관심이 있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계셨다는데, 그곳은 남학생만 다니는 대학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맞습니다. 저는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연구소로 간 것입니다. 연구소는 이름만 같을 뿐이지 대학과 별개로 운영됩니다.”

“혹시 공부하신 대학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학위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임주호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강국과 장준하는 임주호의 사무실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수많은 외국 신문, 잡지와 서적을 보고 놀랐다.

“저는 수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공부를 못해 대학에도 못 갔고, 그나마 치과대학도 학병 징집으로 다니다 말았습니다. 그래서 누나의 권고로 국제 정세와 한국 역사를 조금 공부해 보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주로 공부했던 것은 약소민족의 건국사입니다.”

신탁통치,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임주호는 세 사람에게 리포트 비슷한 것을 나눠 주었다.

“사실은 옛날 독서회 같은 것을 다시 해 보라는 누나의 권고가 있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주로 듣기만 했는데 오늘은 소견을 한 번 말해 볼까 합니다.”

리포트의 첫 장에는 전쟁이 종료되기까지 있었던 강대국 수뇌들의 회담 동향이 적혀 있었다. 이강국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장준하로서는 너무도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명민한 장준하는 순식간에 사태를 이해했다. 리포트는 한 민족의 진로가 결코 민족 내부의 의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는 일곱 명의 이름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김일성 - 박헌영 - 이강국 - 여운형 - 장준하 - 김구  - 이승만

“무단으로 이름을 올려 미안합니다. 저는 여기 계신 두 분을 포함한 일곱 명의 이름만으로 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한국의 정세를 진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한 가운데 있는 여운형은 중도 기회주의 세력입니다. 그는 어느 쪽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곧 어느 쪽의 지지도 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무참히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은 송진우가 먼저 당했지요. 그런데 송진우는 여운형과 달리 우익입니다.

맨 왼쪽의 김일성과 맨 오른쪽의 이승만 둘 중에서 하나가 야심을 채울 것입니다. 아니면 둘 다 뜻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소련과 미국이 선택한 인물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파격에 가까운 특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김일성은 소련군의 고급 장교입니다. 이미 그는 소련군의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보십시오. 그는 귀국 당일 조선호텔에 묵었습니다. 조선호텔은 미국인이 아니면 발을 못 들여 놓습니다. 김구가 하지를 만날 때에도 조선호텔이 아닌 이곳 반도호텔 군정청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승만에게는 국민을 상대로 방송할 권한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장로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는 유식하지 않습니다. 민족적, 전통적 교양이 거의 없는 근대화 지향의 인물입니다. 요컨대 미국의 구미에 맞는 약소국 지도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는 3·1운동 후 미국에 위임 통치를 요청해 임시정부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면 그런 일이 생길 줄 모르고 했겠습니까?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의 지지보다 미국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 수뇌부의 신탁통치 결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건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강대국이 지지하는 지도자가 건국 후 정권을 잡는 확률은 99% 이상입니다. 그들이 엉뚱한 짓만 안하면 됩니다. 분명 이승만은 미국의 비밀 정보기관과 선이 닿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박헌영 선생이나 김구 주석은 뭐란 말이오?”

답답했는지 이강국이 물었다.

“앞에 계신 두 분이 섭섭히 여겨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박헌영과 김구를 좌와 우의 동격으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 내내 투쟁으로 일관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김구는 합병 전에도 투쟁을 했지요. 하지만 그는 해외에 체류했습니다. 반면 박헌영은 국내를 지키며 해방의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가 두 분을 동격으로 간주하는 것은 투쟁 경력 때문이 아닙니다. 박헌영은 좌익이고 김 구는 우익입니다. 그런데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순수 민족 세력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강국 선생과 장준하 형은 각각 그들을 돕는 핵심 일꾼입니다. 제가 두 분께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꺼낼 때가 되었습니다. 순수 민족 세력이 정권을 잡을 확률은 제로입니다.”

“임형, 너무 독단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이번에는 장준하가 이의를 제기했다.

“저는 약소민족 건국사의 통계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장준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장형은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까?”

장준하는 임주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가 신자라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이오?”
“신학교거나 교회지요.”

이번에는 이강국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돌아가라고 말하겠군요?”

임주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야학이나 노동현장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강국과 장준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기 않았다. 장준하가 물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설령 임 형 말대로 실패한다고 해도 나라와 역사에 뜻있는 일이라면 회피하지 말고 도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순수한 민족 세력이 강대국을 상대로 투쟁을 하면 목숨을 잃게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번에는 이강국이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 집요한 제국주의 파시스트들 손아귀에서도 잡초처럼 견디며 살아남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누가 그 분들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 두 분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뭐요?”
“여기 계신 두 분이 죽을 확률도 아주 높습니다.”

대화가 무르익어가자 임수경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말씀들 더 나누십시오. 호텔 직원을 보내드릴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더 시키십시오.”

임수경이 나가려 하자 이강국과 장준하는 서둘러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방문을 닫고 복도에 나온 임수경은 마음이 뿌듯했다. 동생이 공부를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그녀는 자신이 동생보다 두뇌가 좋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죽은 그녀의 아버지도 인정했었다.

“주호는 엄마를 닮았고 너는 나를 많이 닮았다.”

아버지는 일찍 죽은 자기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두뇌가 좋은 사람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한 쪽에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은 임주호에게 또 물었다.

“그럼 타개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타개책은 없습니다. 다만 연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미소의 신탁통치 제안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그건 공산주의자들의 논리 아닙니까?”

당혹해 한 것은 장준하였다. 김구가 신탁통치 반대에 선봉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강국은 깊은 생각에 잠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우익과 좌익을 대표하여 격론을 펴지는 말아 주십시오. 애초 초청 의도대로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닌 사람의 의견을 청취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장준하가 물었다.

“그렇다면 임 형 생각을 더 들어야겠군요?”
“백범은 열정과 인품에 비해 현실 감각이 부족합니다. 그가 반탁운동을 극렬히 벌이는 것은 감정에 휩쓸린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이승만에게 이용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심하게 말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 가능하면 해를 넘기지 않고 끝내기 위해 연재 분량이 다소 많을 수도 있습니다.



태그:#신탁통치, #김구,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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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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