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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는 승승장구하던 안두희의 삶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4·19 이후 김구선생살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암살범 안두희의 기구하고 척박한 인생 역정이 시작되었다.

안두희는 신변에 불안을 느껴 은신했지만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적발되어 경찰에 넘겨졌다. 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 나왔다. 이어 1965년 백범독서회 회장 곽태영은 안두희를 찾아내 칼로 목을 찔렀다. 그는 병원의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다. 이후 안두희는 개명과 변장을 하고 이사와 유랑을 거듭해야 했다.

끝까지 함구한 안두희

안두희는 복덕방에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다. 그는 주변 노인들에게 인심을 잘 써 인기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친구를 얻기도 했다. 권중희라는 이름의 한량이었다. 권중희 역시 일정한 일이 없이 복덕방에서 바둑 두는 일을 좋아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절친한 바둑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미세한 바둑 승부의 계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권중희가 손바닥으로 바둑알을 쓸어 버렸다. 권중희는 얼굴에 시퍼런 서슬을 띠며 일어났다. 한량인 줄만 알았던 권중희의 표변한 모습을 보고 안두희는 공포를 느꼈다. 어느새 권중희의 손에는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 놈! 안두희, 민족의 방망이를 받아랏."

권중희는 몽둥이로 안두희의 어깨를 사납게 내리갈겼다. 안두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두희를 실신시킨 몽둥이에는 '민족정기봉'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젊어서 테러범과 북파공작원을 했던 안두희였지만 이제 그는 무기력한 노인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입을 열면 죽음을 받겠다는 각서라도 써놓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의 함구는 백범을 숭배하는 이들의 분노를 샀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몽둥이로 맞거나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다.

안두희는 철저한 위장으로 은신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권중희는 기어이 그를 다시 찾아냈다. 여전히 안두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백범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를 효창공원에 강제로 끌고 가 백범의 묘소에 참배시켰다. 그러면 마음이 움직여 진상을 털어 놓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두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횡설수설로 일관했다.

몇 년 후 안두희는 새로 만나 살게 된 여인과 함께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그는 비밀리에 미국 이민 수속을 밟아 놓은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미국 대사관의 이민 입국 심사를 통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무서운 조국을 떠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고 있었다. 그가 짐을 끌고 막 개찰구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네 이놈, 안두희!"

호통과 함께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노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권중희의 얼굴도 보였다.

"세상이 여전히 쉬운 줄 알았더냐."

소신여객 버스 기사 박기서

출국장에서 다짜고짜 안두희를 끌어낸 노인들은 그를 백범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로 데려갔다. 노인들은 안두희에게 진상을 털어놓는 것이 바른 참회이며 그것이야말로 곧 속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안두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안두희는 인천에 있는 한 허름한 아파트로 피신했다. 그는 두문불출하며 철저히 은신하는 삶을 살았다. 집요하게 추적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한 많은 20세기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마감되는 시점이었다. 안두희의 처가 슈퍼에 가려고 아파트 문을 나섰을 때였다. 한 노인이 안두희의 처를 밀치며 무작정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인천과 인접한 도시인 부천의 버스 기사 박기서였다.

한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버스 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집에 돌아간 나는 잠깐 눈을 붙인 후 새벽 3시경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에 넣고 안두희의 집으로 갔습니다.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시간을 노렸던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틀렸나 보다'하고 있는데 마침내 문이 열렸습니다. 오전 11시 경이었어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라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는 일어나 나를 노려보았어요. '네가 백범 선생을 정녕 암살했느냐?'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안두희는 무언으로 시인하는 듯했습니다."

- 암살 사실은 쉽게 시인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안두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라고 나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두희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분명치가 않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짐작으로, 자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너를 처단하겠다'고 말했는데, 마침 안두희의 처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뒤쪽을 쳐다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더니 아파트 문이 열려 있는 겁니다.

내가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나는 안두희의 큰 키와 주먹을 보고 위압감을 느꼈지만,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적개심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몽둥이를 내리쳤습니다.

안두희는 쓰러졌습니다. 나는 안두희의 처를 다른 방으로 보냈습니다. 안두희의 처는 내 눈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자기는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거실로 나와 안두희 앞에 가 섰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보이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 주려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기서의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대법원 형사 2부에서 3년 확정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각계의 구명운동으로 2년 만에 풀려나왔다. 2년이지만 안두희의 복역 기간보다는 긴 것이었다. 그는 다시 버스 기사로 돌아갔다. 그가 다니던 버스회사의 이름은 소신여객이었다. 물론 그 '소신'(所信)은 아닐 터였다.

백범, 누가 죽인 것인가

김구의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준하는 임주호를 찾아갔다. 임주호는 혼자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준하는 임주호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번쩍 고개를 쳐들면서 물었다.

"임형, 대관절 누구의 짓이오?"
"백범의 죽음으로 이익을 볼 집단이겠지요."

임주호의 설명에는 무서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안두희는 포병 장교일 뿐 아니라 주한 미군의 정보요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내 극우 테러 단체와 선이 닿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정은 최고 친미파 장덕수의 암살을 한독당 소행으로 몰았잖습니까? 그 사건으로 김구는 미군 중위의 무례한 취조를 받았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미군정이 김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이 지어 붙인 별명에서 드러납니다.

김규식은 시클리(sickly), 이름자 '규식'에서 딴 별명이겠지요. 아울러 약골이란 뜻이고요. 여운형은 '실버엑스', 은도끼처럼 겉보기에는 좋은데 막상 써 먹을 수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백범에게는 '블랙타이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들은 백범을 제거해야 할 맹수로 본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김구의 죽음은 미국과 이승만의 합작품입니다."

"그러면 안두희 패거리는 무엇이지요?"
"극우 테러리스트 결사체겠지요. 그들을 미국이 이용한 것이고 이승만이 후원했다고 나는 봅니다."

임주호는 장준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장준하는 광복군 시절 중국에서 만들었던 잡지 <등대>와 <제단> 이야기를 했다. 임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앞으로 5,6회 더 연재된 후 막을 내립니다.



태그:#백범, #안두희, #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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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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