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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과 베어드는 동거 1년이 넘어서면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수임은 베어드의 서재에서 무심코 그의 바인더 북을 넘겨보다가 안표지의 이면에 붙어 있는 웬 여인의 사진을 발견했다.

여인은 가운과 모자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 졸업 앨범 사진인 것 같았다. 김수임은 사진의 여인이 임주호의 누나 임수경임을 대뜸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언젠가 호텔로비에서 베어드와 임수경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베어드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인에게 그렇게도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처음 본 김수임은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베어드는 자기의 상관 맥아더에게도 그보다 더 공손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베어드는 미국 연구소에서 만나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했지만, 그의 눈빛에 감도는 분위기로 보아 그 이상임이 분명해 보였다.

반면 임수경의 표정은 담담했다. 차라리 임수경이 베어드를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더라면 믿을 만했다. 그렇다면 베어드가 임수경을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김수임은 베어드를 처음 본 날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스 김은 내가 본 동양 여성 중 두 번째로 아름답습니다."

김수임은 사진의 뒤에 쓰여 있는 베어드의 글씨를 읽었다.

'영원한 나의 사랑.'

베어드의 사랑은 임수경이고 자기는 그녀의 대역일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김수임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언제나 이강국 때문에 베어드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최근 들어 이강국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김수임을 버리기로 한 베어드

사실 이강국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김수임은 어느 날 이강국의 홍릉 아지트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정기적으로 그의 아지트에 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해 주었다. 특히 된장찌개라도 끓여 놓고 있을 때, 이강국이 들어와 조그만 밥상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그녀는 무한정한 행복감을 만끽했다.

그녀는 이강국에 대한 사랑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든지 그를 돕다가 때가 되면 함께 월북해서 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가 호텔 일을 그만둔 것도 이강국을 돕기 위해서였다.

대담해진 그녀는 베어드의 차를 타고 운전병과 함께 홍릉에 가는 적도 있었다. 그녀는 운전병 맥도날드에게 언제나 적지 않은 팁을 주었다. 수더분한 성격의 맥도날드는 넙죽넙죽  돈을 받으며 김수임을 누나처럼 따랐다. 그는 홍릉 집이 친척집이라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베어드도 김수임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일주일에 한 번씩 홍릉에 가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의 부하가 한국인 정보원을 시켜 알아낸 것이었다.

베어드는 자기에게 임수경 같은 첫사랑이 있듯이 그녀에게도 남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시켰다. 내년이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그는 김수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제는 두고 갈 수 있는 빌미가 생겼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베어드는 나윤숙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나는 임기를 마치면 수임을 미국에 데려갈 수가 없게 되었소."

김수임이 남자를 만난다는 말을 들은 나윤숙은 그 남자가 이강국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김수임이 이강국의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점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나윤숙은 베어드에게 그 남자가 이강국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서운 사실이었다. 이강국은 이제 완전한 공산당 간첩이었다. 그가 남한에 있으면서 김수임과 내통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잡하게 비화될 소지가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그것은 자기 신상에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신중히 소리 소문 없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을 늦출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베어드는 물론 자기에게까지 여파가 미치지 말란 법이 없었다.

박헌영과 이강국이 북으로 간 까닭

이미 북한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국가를 만들어 남한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김일성은 북에서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동북항일군을 지휘하다가 1940년 소련으로 돌아간 김일성은 제88특별저격여단의 제1영장을 맡았다. 그 후 김일성은 태평양전쟁 종결에 대비하여 조선공작단위원회의 정치·군사 담당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해방 후 60명의 일행과 함께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으로 들어갔다.

38선이 확정된 상황에서 그들은 공산당 중앙부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북조선 공산당 조직 구성을 서둘렀다. 그들은 서울 중앙당 책임 비서 박헌영의 양해를 얻어내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설치하고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한 인민정권 수립 노선을 채택했다.

3차에 걸친 집행위원회를 열며 당권을 장악해 간 김일성은 박헌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작업을 전개했다. 박헌영과 이강국이 남로당 재건 투쟁을 포기하고 서둘러 북으로 간 데에는 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아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조선분국은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고 박헌영, 홍명희, 김책 등을 부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친소정권이 수립되고 말았다.

이강국이 북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임주호는 이강국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강국은 임주호에게 장춘단 다리로 좀 나와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임주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러겠다고 응답했다.

이강국을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임수경은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가 하고 있는 걱정을 나도 하고는 있어. 하지만 이런 경우에 어떻게 안 만날 수가 있겠어?"

임수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국의 외모는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이야 위장을 위해 그렇다 치더라도 얼굴은 파리했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박헌영이 북에 간 후 그는 북으로 가는 남로당 간부들을 도와 월북시킨 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이강국은 폐병이 도져 있었다. 임주호가 보기에 그는 이미 혁명의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사회주의보다 민족에 대한 애착이 깊어 보였다. 또한 그는 이념보다는 우애를 소중히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임주호는 일제 때에 노동운동을 할 때에도 여유가 있고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폐인 같은 지경으로 영락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내가 임형에게 폐를 끼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 나도 이제 남조선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소."

임주호의 판단으로 이강국이 무사히 북으로 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몸으로 경계가 강화된 삼팔선을 넘기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이 선생님, 북으로 갈 대책은 있는 겁니까?"

임주호는 구름이 무겁게 덮여 있는 남산 봉우리 쪽을 보며 물었다.

"내가 그것까지 임형에게 말해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소."

임주호는 준비해 간 돈 뭉치를 꺼냈다.

"38선을 넘을 때 넘더라도 이것으로 우선 병이나 치료하시지요."

이강국은 머뭇거리지 않고 돈을 받았다.

"임형, 통일 되거든 만납시다."
"부디 무사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앞으로 4,5회 정도 더 연재된 후 막을 내립니다.



태그:#이강국, #김일성,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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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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