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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이강국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김수임의 희망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늦어지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강국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가 자기를 소홀히 생각한 나머지 자기에게 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 들어 슬펐지만 이제 그녀는 이강국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다.

김수임이 나윤숙의 전화를 받은 것은 봄이 막 시작하는 3월이었다.

"수임아, 너는 어떻게 내 생일도 모르니?"

그러고 보니 매년 챙겼던 나윤숙의 생일을 그녀는 놓쳐 버렸다. 그녀는 나윤숙에게 미안했다.

"괜찮아. 새 김치를 담갔는데 네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 연락한 거야."

나윤숙은 얼굴도 볼 겸 김치도 가져갈 겸 한번 오라고 했다. 김수임은 부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마워 눈물까지 나올 정도였다. 자기는 거의 잊고 지냈는데 나윤숙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김수임 체포, 나윤숙과 베어드의 역할

김수임은 베어드에게 전화를 걸어 나윤숙의 집에 간다고 알렸다. 그녀는 생일을 기억하지 못해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베어드는 운전병 맥도날드에게 나윤숙의 생일 선물까지 실어 보냈다.

김수임은 나윤숙을 만나면 혹시 북쪽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다정스러운 마음으로 나윤숙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나윤숙과 속 터놓고 이강국의 이야기를 나눠 보리라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하지만 김수임의 앞에는 무서운 일이 닥치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차를 미행해 오는 검정색 시발 자동차 두 대를 알았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는 한국의 정보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회현동 나윤숙의 집 앞에 내린 김수임은 초인종을 눌렀다. 맥도날드는 차를 돌리려고 골목 끝으로 가고 있었다. 조금 지나 나윤숙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복형사들이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잡았다. 그녀가 체포되는 장면을 본 사람은 나윤숙뿐이었다. 얼마 후 문 밖에 나온 나윤숙은 운전병 맥도날드를 미군 사령부로 돌려보냈다.

나윤숙과는 별도로 한국 수사기관에서도 김수임을 이강국의 탈출을 도운 용의자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베어드는 그것이 나윤숙의 신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어드는 자기 집에서 김수임이 체포될 경우 후유증이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강국 탈출 건에 대해 자기는 전혀 몰랐던 것으로 하려면 아무래도 밖에서 체포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수사관이 자기 집으로 들어올 경우 치외법권 지역을 침입하는 것이 되어서 미국의 여론에서도 쓸데없는 논란이 생길 수 있었다.

김수임이 당황하며 몸을 비틀자 수사관들은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고는 차에 태워 용산에 있는 육군 형무소로 달렸다. 손발을 결박당하고 눈이 막힌 김수임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건 뭔가 착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들의 무전 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 간첩 체포, 여 간첩 체포. 완벽한 성공작입니다."

그 날 석간과 이튿날 조간의 톱기사는 하나같이 무자비한 타이틀로 보도했다.

'여간첩 김수임 체포'’

그리고 기사들은 이화여전 영문과, 미모의 인텔리, 사련의 종말, 한국판 마타하리  등의 중간 표제어로 도배되어 있었다.

임주호도 체포되다

신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던 임수경은 문득 시선이 굳어버렸다.

'연인 간첩, 특급호텔에서 호화 도피 생활'

기사에는 이강국과 김수임이 서울 시내 특급 P 호텔에서 주로 도피 생활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임수경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과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급히 커피를 만들었다. 그녀는 커피 잔을 손에 쥔 채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임주호가 체포된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그들은 임수경이 미처 손써 볼 겨를도 주지 않았다. 임주호는 김수임과 그리 멀지 않은 감방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김수임과 두 차례 대질 심문을 해야 했다.

임주호는 퍼렇게 멍든 눈으로 김수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고뇌와 연민이 배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흉할 정도로 빠진 김수임은 임주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은 하염없는 미안함을 묵언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임주호는 그녀 입술 주변에 번져 있는 주황색 핏물을 이윽히 보고 있었다.

1950년 6월, 속전속결로 진행된 고등군법재판에서 임주호는 징역 15년이 확정되었다. 간첩 은닉과 자금 조달이라는 죄목이었다. 김수임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강국에게 받아 간직하고 있던 권총이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그녀에게는 간첩 및 이적행위를 명시해 놓은 국방경비법 제32조가 적용되었다.

평양에 간 이강국은 조국 통일의 꿈을 포기한 대신 김수임의 구명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그는 북에 수감되어 있는 조만식과 남에 갇혀 있는 이주하· 김삼용을 교환하려는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교환 대상에 김수임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김수임이 미군 고급 장교의 애첩이었다는 사실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마침 북에서는 중국 연안파에 대한 숙청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연안파 제거가 끝나고 남로당 세력의 지지만 얻게 되면 소련파 김일성의 노선에 방해될 것이 없었다.

김수임의 구명을 주장했던 남로당 출신 이강국은 오히려 북로당으로부터 역공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이강국은 북로당 실세들과 험악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그의 당내 입지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나윤숙은 김수임의 언도 공판에 특별 변호라는 명목으로 입정을 허락받았다. 그런 법적 조항이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특별 변호는 나윤숙이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에게 부탁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윤숙은 착검을 하고 있는 육군 헌병들 사이에 앉았다. 조금 지나자 김수임이 나타났다. 김수임의 손과 발에는 수갑과 차꼬가 채워져 있었다. 나윤숙은 포승줄에 결박되어 있는 김수임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순간 나윤숙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김수임의 흙빛 얼굴과 풀려 있는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변론을 시작했다. 

"김수임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까지 아름답고 재능 많은 처녀였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순진했기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인간적인 도리로 사형만은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론 같지도 않은 변론이었다. 그러자 검사가 일어나 나윤숙에게 물었다.

"변호인은 피고에게 사형이 극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윤숙은 고개를 숙인 채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거짓말을 사함받고 싶어요

김수임의 사형 집행은 불과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 나윤숙은 사형 집행 전날 특별 면회를 통해 김수임을 만났다. 면회실에서 그녀는 김수임에게 헤르만 헤세의 시 <흰구름>이 자필로 정서된 쪽지를 주었다.

나는 태양과 바다와 바람과 같은 / 하얗고 정처 없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것들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의/ 자매이며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김수임이 시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녀는 쪽지를 탁자 위에 버려 둔 채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수임아…."

나윤숙은 쪽지에 눈을 주며 나직하게 김수임을 불렀다. 김수임은 연민과 증오가 엇갈리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언니 같은 사람 때문에 또 죽게 될 사람이 생기면 또 그 사람에게 이런 시를 주겠지."

김수임의 고해성사를 받은 이는 그녀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성공회 임성관 신부였다. 김수임은 신부에게 단 한 가지 죄만을 고백했다.

"법정에서 이강국 선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한 죄를 사함받고 싶어요."

김수임은 멀리 한강이 보이는 형장에서 총살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다음 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태그:#김수임, #여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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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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