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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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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이 다시 판치게 된 세상

며칠 후 6월 25일, 북에서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삼팔선을 넘어 내려왔다. 질풍노도처럼 밀려온 북한 군대는 남한 군대를 불과 3주 만에 낙동강 아래로 밀어냈다. 남한의 육군 본부는 대구로 급히 옮겨가야 했다.

문학평론가 팔봉 김기진은 대구에서 종군 작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문화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육군 정훈감이 대구에 있는 문사들을 초청한 자리였다. 중앙에는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이 앉아 있었다. 그 날 좌담회에는 20명 정도의 문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회를 보는 정훈감이 김기진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다. 김기진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944년 11월에 나는 이광수와 함께 남경에서 열리는 문학자 대회에 갔었습니다. 2일 간의 회의를 마치고서 상해까지 오는 도중 우리 일행 40명은 소주(쑤저우)에서 내려 소주 일본군 사령부를 방문했습니다. 일본 대표, 남지나  대표, 조선 대표 등이었습니다. 사령관은 없었고 참모장만 있었는데, 그는 우리가 들어가니까 끝까지 기립한 채 정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50이 넘어 보이는 일본군 소좌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이 지금 지나 대륙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것은 점과 선뿐입니다. 천진, 북경, 서주, 남경, 상해… 이 같은 점들을 연결하고 있는 선만을 일본군이 가지고 있습니다. 점과 점을 연결하는 철도선의 5마일 밖부터는, 그것은 일본군의 점령 지대가 아닙니다.

여기는 왕정위 정권도 미치지 못하고, 장개석 정권도 미치지 못하고, 오직 팔로군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그들은 즉 지나 공산당은 일정한 방침 밑에 구체적 설계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 설계 밑에서 조직적 실천을 합니다. 여기에는 장개석도 왕정위도 일본군도 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바로 이것입니다. '일정한 방침과 조직적 설계와 구체적 실천'을 하는 것이 바로 적인데, 우리는 일정한 방침도 없이 그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같군요. 군에서만이라도 문화에 대한 일정한 방침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김기진은 긴 발언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장내는 조용했는데 참모총장 이종찬이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김기진은 곁눈으로 볼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대동아 공영권을 홍보하는 문인대회에 갔던 경험을 친일 문인 김기진은 불과 7년 만에 해방된 조국의 군대에서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기진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은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이었다.

나윤숙의 영달

그로부터 5년 후인 1956년, 나윤숙은 미 국무부의 초청으로 문화 교육 시찰을 다녀온다. 그녀는 '미국문화와 한국적 반성'이라는 글을 시찰기 명목으로 발표했다.

"그들 미국인은 20세 이상이 되면 의존심이 없고 확고한 자아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사색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동등하고, 불공평은 멸망의 씨라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듯하다. 사소한 불공평이라도 있다면 당장 공론에 의해서 억제되고 만다.

이와 같은 미국의 현재는, 그들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문명과 민주주의 때문에 달성된 것이다. 그것은 짧은 역사 위에서도 미국의 교육 정신, 이념이 오랜 역사를 가진 타국을 비판하고 투쟁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엿볼 수 있었다."

불과 10여 년 전 식민지 시대에는 영· 미국의 죄상을 들어 알고 보니까 황인종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괘씸하고 분한 일이었다고 말한 나윤숙이었다.

그녀는 제3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1948), 한국문화단체연합회 최고위원(1955), 공화당 전국구 의원(1972), 국제펜클럽 한국위원회 위원장(1977)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1967)과 국민훈장 모란장(1970)과 3· 1 문화상(1979) 등을 수상하게 된다. 그녀는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준하와 이강국·김수임의 죽음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 장준하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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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출판 문화인으로 대성했다. 그가 만든 잡지 <사상계> 는 뜻있는 한국 지식인들의 열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5·16 후 정권 민정 이약 약속을 위배하자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서게 된다. 1974년 그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징역 15년을 언도받는다.

이미 그것은 장준하의 세 번째 옥살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연말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 하지만 그 석방은 박정희의 회유책이었다. 그는 간과 심장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장준하는 불과 며칠 후인 1월 8일 박정희에게 '병상에서 보내는 편지'를 띄운다.

1.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 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 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명예롭게 스스로 택함은 물론, 앞으로 모든 집권자들의 규범으로 삼게 할 것.

2.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무조건 석방할 것.

3. 학원· 종교· 언론 사찰을 즉각 중단하고 야비한 정보 정치의 수법인 이간 분열 공작으로 더 이상 불신 풍조와 상호 배신행위 습성을 우리 사회에 조장하지 말 것.

그 해 여름 장준하는 서울 교외에 있는 산에 오르다 떨어져 죽는다. 여러 명이 같이 간 산행이었지만 그의 추락 장면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죽기 전 웬 군인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사람은 있었다.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얌전히 누워 죽어 있던 장준하의 후두부는 직경 2센티 크기로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 장준하의 죽음은 그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김구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킨 채 끝내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이강국은 인민군 야전병원장을 맡아 서둘러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김수임이 아직 총살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수임의 형이 확정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수임은 6· 25보다 일주일 전인 6월 18일에 총살되고 없었다.

이강국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한직으로 밀려났다. 남한에서 임정세력이 몰락했듯이 북한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제거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선배이자 스승인 박헌영은 이미 산골 오지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강국이 체포된 것은 6· 25 직후였다. 그는 박헌영과 함께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 받는다. 남쪽의 연인 김수임과 마찬가지의 죄목인 간첩죄였다. 연인이 남과 북에서 각각 똑같은 간첩죄로 사형 언도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얼마 후 박헌영과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임수경·임주호 남매의 성취

임주호는 6· 25 덕분에 감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느 날 덜커덕 감방 문이 열리더니 문 앞에 이강국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강국은 임주호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강국과 임주호는 밤새도록 보드카를 마셨다. 임주호의 누나 임수경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강국은 임주호에게 월북을 권유했지만, 임수경이 고개를 저었다.

임수경은 동생이 구속되자 서둘러 미국에 다녀왔었다. 그는 변호사를 사서 자신의 미국 국적 취득 건을 맡겼다. 그녀가 미국 국가 안보를 위해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한 경력은 미국 국적 취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베어드를 찾아가 임주호의 석방 탄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던 차에 6· 25가 터진 것이었다.

이강국 덕분에 석방된 임주호는 밀항선을 타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령 괌으로 들어갔다. 임수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매는 괌에서 작은 호텔을 경영하다가 임주호의 법적 거주 문제가 해결되자 미국 본토로 옮겨갔다. 임주호의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러갔다. 스웨덴의 왕립아카데미에서는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남매 과학자 임수경· 임주호가 노벨 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매 과학자는 며칠 후 미국인 국적으로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스웨덴에 전화했다. 노벨 위원회는 그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의 수상 거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상자는 한 번 결정 후 번복될 수는 없다'는 규정에 따라 그 해의  물리학상 수상자는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끝)

덧붙이는 글 | 오늘 187회 연재로써 3부작 <제국과 인간>을 마감합니다. 1년 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새 소설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태그:#이강국,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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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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