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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 일입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아버지의 학력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우라질! 그딴 건 왜 적어 오라는겨?’

울 아버지는 국민(초등)학교도 겨우 나오신 분이셨습니다.

 

하여 곧이곧대로 적었다가는 그야말로

‘쪽 팔려서’ <대졸>이라고 뻥튀기를 했지요.

 

당시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웠으므로

아버지 세대는 고작 국졸(초졸)학력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건 제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요.

학교라곤 아예 문턱도 못 넘어본 분들도 많았음은 상식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같은 대물림(?)은 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도 겨우 초등학교만 마치곤

삭풍이 휘몰아치는 사회로 떠밀려 나와야만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긴 하되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보니

그대로만 살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하여 아이들이 자랄 무렵부터는 주말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일부러 도서관을 다녔습니다.

 

자연스레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부화뇌동으로 저 또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게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책을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레 머리에 축적되는 건 바로 지식이었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저는 십여 년 전부터 여기저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창간된 오마이뉴스에선 ‘사는 이야기’라는 고대했던

꼭지까지 있어 저로선 그야말로 마음껏 날 수 있는 공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로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린 지 어언 8년째입니다.

누구처럼 채택된 글이 채 1000건은 못 되지만

우보천리(牛步千里)의 묵묵함으로 계속하여 정진할 작정입니다.

 

여하튼 초졸 학력뿐의 무지렁이는 학력과 학벌이

여전히 득세하는 이 사회에선 늘 그렇게

변방의 골짜기라는 빈궁과 음습의 협곡만을 점철하게 하는 단초였습니다.

 

지금도 생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비정규직의

험한 나날은 만날 그렇게 찌들고 어려운 일상의 반복입니다.

현실은 이러하되 자랑할 게 없는 건 아닙니다.

 

우선 두 아이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 할 만치로 정말 잘 키웠다고 자부합니다!

특히나 딸은 현재 서울대 4학년을 휴학 중이지만

재학 내내 장학생을 놓치지 않은 자타공인의 재원입니다.

 

두 달에 한 번씩 고향의 초등학교 재전(在田)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따금 동창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네가 남들처럼 배웠더라면 필경 지금쯤 큰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싫은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러자면

저는 으레 치지도외하면서 서둘러 폭음으로서 그 자리를 면하고자 바쁘곤 하지요.

 

늑대 떼에게 쫓기는 가녀린 토끼처럼 그렇게

진둥한둥 살다보니 작년에 지천명의 고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해가 바뀌게 되니 그 나이에 숫자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요.

 

여하튼 그동안 이 풍진 세상을 살면서 이웃이나

남들에게 결코 해로운 일을 한 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국민과 시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적도 없고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도

술 하나만 빼곤 여전히 당당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늘 그처럼 쫓기는 삶을 살았으되

지식과 정보의 습득과 취득에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토양이 있었기에 지난달에는

‘우리말 겨루기’에도 출연할 수 있었던 겁니다만.

 

학력과 학벌이 구축해 놓은 철옹성의 육중한 벽이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이 벽이 위치한 성(城) 안에 들어가지 못한

저와 같은 무지렁이와 필부들은 허구한 날 피곤하고

어렵게만 살아야 하는 게 불변의, 그리고 ‘또렷한’ 현실입니다.

 

수년 전 어떤 문학상을 타면서 한국문인협회로부터 등단하라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사하기로 작심했지요.

그건 우선 제가 누구처럼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도 아니라는 편견의 자격지심이 동기였습니다.

 

또 하나는 문인으로 등단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프로’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기고와 투고를 하여

받게 되는 투잡스 차원에서의 원고료 등의 부수입이란

‘아마추어’ 적 행보에도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두 아이를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던 건

솔직히(!) 방대한 독서에서 기인한 글쓰기란 재주 덕분이었음을 밝힙니다.

 

지금도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책에서 새로운 단어와 풍경 등을 만나면 반드시 그 걸

메모하고 머릿속에도 구겨 넣는 걸 습관화하고 있지요.

 

얼마 전 평소 애청하는 지역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아나운서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글(사연)을 올려 거기서 받은 상품(권)도 쏠쏠한데

그대로만 있는다는 건 도무치 양심이 꺼려 견딜 재간이 없는 때문이었지요.

 

그 방송국을 찾아가 담당 아나운서님과 보도 제작국장님께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왕 애청자가 오셨다!”며 정이 담긴

뜨거운 차를 주시면서 아나운서님이 물으시더군요.

 

“근데 홍 선생님은 어찌 그리 글을 잘 쓰세요?” 

하여 비로소 이실직고했지요.

 

“실은 제가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입니다,

그것도 8년 차의 고참으로요...”

 

그러자 아나운서님은

“그럼 그렇지!”라며 저를 다시 보는 시선이 뚜렷해 보였습니다.

 

언젠가 왜 모든 불행과 불학(不學)의 고통은

유독 그렇게 나만 쫓아다니는가 하는 편협함의 강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조실부모의 지난함과 가난의 이중주라는

가시밭길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하였거늘 왜 하늘은

이다지도 견디기 어려운 난제를 자꾸만 던져주는가 라는

원망의 화살을 하늘을 향해서도 마구 쏘아대곤 했지요.

 

허나 그럴 적마다 부메랑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건 역시나 자학의 되새김질일 따름이었습니다.

이후 마음을 굳게 다잡았습니다.

 

제가 비록 아버지처럼 초등학교도 겨우 마쳤으되 그러나

진실된 학력은 대졸자 이상으로 구축하자는 오기가 발동했다고나 할까요.

 

허튼 얘기가 되겠으되 아무튼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면 저는 분명 이 얘기를 하고자 했었습니다.

그건 바로 “저는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살아온 지 8년 차가

되다보니 갖가지의 경사와 에피소드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민기자들의 이와 관련된 글 내용이

풍성하여 거기에 묻힐 듯 싶어 굳이 피력하진 않으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쯤은 매달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50년 이상이나 그 무거운 돌덩어리를 매달고

살다보니 이젠 솔직히 징그럽고 지겹습니다!

 

근데 저의 무거운 돌덩어리의 가쁜 무게도

그러나 올해만 지나면 가벼움으로 변화할 조짐이 농후해 보입니다.

올해만 지나면 아들과 딸 모두 대학을 졸업할 터이니 말입니다.

 

두 아이가 대학을 마치면 여전히 헉헉대는

경제적 고립무원의 사면초가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보입니다.

 

그러고 나면 오마이뉴스에의 보다 활발한 기고는 물론이고

‘정식’으로 문인 데뷔가 가능한 코스인

신춘문예에도 더욱 공격적으로 돌진하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입니다 


태그:#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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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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