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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번에 오마이뉴스가 '창간 9주년을 맞이한다고 들었다. 나도 투고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별로 실적이 없는 것도 그렇고 역시 한글 표현도 어렵고 기사 쓰기도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서 쉽게 투고를 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가 버리고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글을 보내본다. 아직 완벽하게 한글도 외우지 못하고 부족해도 글을 올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오마이뉴스'에는 있다고 생각해 왔다. '오마이스쿨'에서 2007년 10월말에 '한일 친구 만들기'가 진행되었을 때,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 '오마이뉴스 재팬'의 시민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뭔가 '오마이뉴스'에는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나의 한글표기가 부족해서 수정을 해주실 분들에겐 항상 미안함도 느끼면서도 2007년에 8월의 '생나무' 기사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한달에 한번 정도의 투고를 목표로 기사쓰기를 해왔다.

 

특히 지난 해 '오마이뉴스 재팬'이 '오마이 라이프'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본의 시민기자들 중에서도 한국 '오마이뉴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 있어 '오마이뉴스 재팬, 뉴스게릴라들 그 후'라는 시리즈를 만들어 기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지난 해부터 '한국이주 노동자 인권 센터'에서 '다문화 강사 양성 강좌'에 참석하게 된 계기로 우리 다문화 가정에 대한 기사도 쓸 기회가 많아져 '우리 다문화 가정 이야기' 시리즈로 기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한일간의 가교(架橋), 시민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던 일

 

다문화 가정에 대한 미디어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오마이뉴스의 내 기사를 본 다문화 가정 대상의 인기있는 방송프로그램의 관계자 분이 연락 주신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내가 시민기자 활동을 할 정도는 인정해도 우리 가족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는 것에는 저항이 있었다. 내 자신도 나의 사생활을 보여드릴 만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과 좁은 집에서 촬영하면 서로 불편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한일 친구 만들기'의 사례발표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이지만 역시 '한일간의 가교(架橋)'가 되기 위해 시민기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하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 목표를 조금이나마 달성했던 일이 있다. 2007년의 '한일 축제 한마당'을 취재해 오마이뉴스 재팬에 기재했던 '한국 경상북도로부터 언젠가 일본에 향해서'라는 기사다. 당시 경상북도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예천통명농요' 보존회 회장님에게 일본에서 공연하고 싶었고 일본의 시마네현에서 시찰하러 온 일도 있었는데 ('독도문제'때문인지) 어렵게 되버렸던 일을 들었었다.

 

그래서 지난 해 가을에 그 회장님부터 연락 와서 2009년에 일본에서 공연할수 있는 기회를 소개해달라고 나에게 연락 온 일이 있었다. 나는 '한일교류투어' 경험이 풍성한 '한일문화교류연합회'의 마스부치 회장님을 회장님에게 소개했다. 그분의 활동 덕분에 올해 5월에 일본의 규슈 지방의 어떤 축제에서 공연을 하게되었단다.

 

내가 했던 일은 그냥 내가 쓴 기사를 통해서 그 보존회를 소개했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보존회의 회장님이 전화까지 주셔서 "덕분에 일본에서 공연할 계획 세우게 해주셔서 감사한다" 라는 말까지 듣게 되며 몹시 기뻤고 시민기자로서도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 이런 작은 걸음이라도 한일간의 문화 예술 활동 교류를 통해서 양국간이 더 가까이 될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

 

한국에서 존경받고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공적

 

또 하나 지난 해에 오마이뉴스 덕분에 기쁜 만남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1930년대의 한국의 농업을 연구해왔던 일본인 농학박사인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님의 아들, 다카하시 코시로 선생님과 그의 친족 분들을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는 수원의 '농업 과학관'에 모시며 통역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였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오마이뉴스 재팬에 기재된 시오카와 케이꼬 기자의 '다카하시 노보루~한국에서 현창(顕彰)되고 있는 일본인'라는 기사를 통해서 다카하시 코시로 선생님과 연락하게 되었던 것이였다.

 

▲ 다카하시 노보루 농학 박사가 남긴 실적을 찾아서
ⓒ 야마다다까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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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그때 다카하시 코시로 선생님(이하 코시로 선생님)께 인터뷰 했던 내용이다.

 

- 아버님의 소중한 유고(遺稿)를 모두'농업 과학관'에 기증된 이유는요?

"아버지의 유고나 사진은 아버지가 한반도에서 26년간 연구 조사한 것만으로 내용도 모두 한반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일본의 연구기관에 기증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한국 농업의 기관인'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해야만 활용도 될 것이며 이러한 유고가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입니다."

 

- 이번, 기증된 유고가 전시되어 보관되고 있는 상황을 실제로 확인된 소감은?

"한국에 기증해도 그 보존이나 활용이 불충분하면 기증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카하시 노보루'의 자료를 전시할 공간까지 설치되고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공적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소개되어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견학하고 저는 기증한 것에 대해 안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 당시 아버님이 한국 농업 연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느낀 내용이나 학생시절의 추억 등?

"나의 초등학교(초등학교4년부터 6년까지) 중학교 시절은 북한 황해도 사리원의 농업 시험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농업 시험장에서 농업의 연구를 하고 있던 것은 압니다만 그 내용까지는 아직 어렸던 나에게는 잘 몰랐습니다. 이번 아버지가 남긴 1만3천매의 유고의 일부를 편집하고 대학의 교수님의 협력을 얻어 '한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일본의 미래사로부터 출판하게 되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한국 농업에 대해 연구해 온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는 집에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책상에서 원고를 쓰고 응접실에서 혼자서 영어나 독일어인가 모르지만 원서를 소리 내며 읽고 계셨습니다. 즉 일반의 가정과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함께 어딘가에 갈 때도 반드시 어딘가의 서점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나는 서점에 들어가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 향후의 한일간 교류의 가능성이나 바라는 것은?

"저는 정치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만 '학문에 국경 없다'는 말이 있듯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는 한국이라든지 일본이라든지에 경계를 따지지 않고 진리를 위해서 함께 절차탁마하고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은 일본어를 일본인은 한국어를 각각 습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말의 벽'을 허무는 것이 선결이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80대 후반인 코시로 선생님은 이제야 기억도 안나는 한글의 읽기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서 읽기는 어느정도 가능한 것을 지나가는 전철의 역명을 읽어주면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대해서도 어렸을 땐 아무것도 모르고 왔지만 "전쟁이 일본의 역사상 가장 큰 실수였다"고 어딘가 먼 데를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아보지 못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일반 시민들은 어느 시대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똑같은 실수를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 평화교육 인권교육과 한일간의 시민 학생교류에 도움이 되고  한일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민기자 활동을 하고싶다.


태그:#창간 9주년, #일본, #오마이뉴스 재팬, #문화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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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주민영화제(MWFF) 프로그래머 참여 2015~ 인천시민명예외교관협회운영위원 2016~ 이주민영화제 실행위원 2017.3월~2019 이주민방송(MWTV) 운영위원 2023 3월~ JK DAILY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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