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초영웅(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극장들은 아주 북적댄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인들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처럼 반복된다. 초영웅이 등장하는 영화하면 우리는 흔히 할리우드를 떠올린다. 그러나 미국 주류영화에서 초영웅이 주인공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초영웅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매체는 사실 영화가 아닌 만화였다.
최근에 성공한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이 미국을 대표하는 초영웅이라면, 얼마 전 SBS에서 방송된 데 이어, 다시 MBC의 전파를 타고 있는 일지매는 한국의 대표적인 초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을 비교분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굳이 많은 영웅중에 다크나이트와 일지매를 뽑은 것은 이 두 영웅의 대중적 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만만치 않은 사회악과 마음 속의 악을 대면하며 끝없이 싸우는 초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매력적이다. 둘 다 개인적 원한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느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이라는 각각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악을 응징한다.
초영웅 영화의 대중적 성공배경만화가 아이들의 장르라는 편견과 달리 미국에서 만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주독자층은 주로 성인이었다. 따라서 슈퍼히어로 만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도 권선징악의 단순한 구도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았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맨'으로 끝나는 시리즈에서 초영웅은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슈퍼맨만 해도 외계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엑스맨은 초인적 능력을 자랑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이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에게 돌연변이로 취급당하며 차별받는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초영웅을 다룬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이 개봉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2008년 여름 극장가에서 초영웅의 활약은 대단했다. 아이언맨, 원티드, 헬보이2, 인크레더블 헐크부터 만화 원작은 아니지만 핸콕까지 고려하면 초영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스파이더맨 1편은 역대 흥행순위 10위 안에 들었고, 2편과 3편 또한 20위권 안에 머물고 있다.
초영웅 영화가 화려한 특수효과 및 컴퓨터 그래픽의 활용을 극대화하기에 적절한 장르라는 점도 초영웅 영화의 전성시대를 가져온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술이 받쳐주는 특수효과는 관객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줄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소재가 거의 바닥났다는 것도 이러한 초영웅 영화 전성기의 또 다른 이유로 보인다. 더 이상 새로운 소재를 찾기 힘들어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만화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초영웅 영화의 유행은 기술력과 제작환경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미국 문화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대대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9·11 이후였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졌다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는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해진 미국을 다시 일으켜줄 영웅이 필요했다. 초영웅 영화의 인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개인주의적 영웅 '다크나이트'
최근의 초영웅 영화 가운데 <다크나이트>는 대중적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거머쥔 작품이다. 이를 반영하듯 <다크나이트>는 <타이타닉>에 이어 역대 흥행성적 2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배트맨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전형적인 초영웅과 달리 어두운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초영웅들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범죄의 도시 고담시의 밤을 책임지며 악당을 해치우는 다크나이트도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사회불안을 일으키던 테러리스트 죠커는 다크나이트가 반드시 없애야 할 적이다. 사회 정의를 지키려는 초영웅과 그걸 파괴하려는 악당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배트맨이 세상에 처음에 나온 1939년은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이 끝나지 않은 우울한 시기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디텍티브 코믹스의 한 캐릭터로 태어난 배트맨은 출간되자마자 단행본으로 제작될 정도로 대인기였다. 그리고 60년대에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80년대에도 미니시리즈와 영화로 계속해서 부활했다. 선천적으로 초능력을 타고난 다른 초영웅과 달리 배트맨은 과학기술, 재산, 두뇌를 써서 후천적으로 능력을 터득했다.
대부분의 초영웅은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기자와 초영웅를 넘나든 슈퍼맨이 그렇다. 스파이더맨도 가난한 사진기자나 피자배달부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는 다른 초영웅이 가진 비루한 일상의 정체성과 차원이 다르다. 배트맨은 낮에는 브루스 웨인이 되어 고담시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그는 거대기업을 소유하고 있고 마음대로 멋지게 살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은 멋진 삶을 혼자 누리며 살 수 있는데도 왜 굳이 고생해가며 슈퍼히어로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범죄자에게 부모님이 살해당한 개인적 원한이 그 발단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는 개인적 복수가 아닌 모든 범죄자를 처단하는 고담시의 자경단이 되었다.
배트맨이 개인적 트라우마를 도덕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면 죠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배트맨하면 거대한 고층빌딩 옥상에서 어둠에 잠긴 도시를 응시하다가 날개를 펴고 박쥐처럼 날아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악과 어둠 속으로 날아간 배트맨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현실로 관객을 안내한다. 현실에서 선과 악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고 그 차이는 개인적 판단에서 나온다고 다크나이트는 알려주고 있다. 범죄자와 일반 시민도 상황에 따라서 선과 악이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
미국식 영웅은 집단의 판단에 종속되지 않는 개인주의적 영웅에 가깝다. 이들은 조직에 몸담고 있지도 않고 홀로 활동하며 사회 정의를 지키지만 개인의 자유가 우선이다. 서부개척시대 광활한 황무지에서 홀로 살아남은 개척자 정신이 초영웅에 투영되어 있다.
과도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싫어하며 스스로 법을 만들어 보안관이 되어 공동체를 지켜온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을 징벌하고 법의 집행자가 되어 무질서에 빠진 공동체에 질서를 세운다. 배트맨이 맡은 역할도 고담시의 악당, 비리 경찰 등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서부시대 보안관과 다를 바가 없다.
국가의 시장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배트맨 같은 영웅은 국가와 개인 사이의 틈새를 파고들 수 있었다. 사적영역의 질서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국가가 아닌 다른 영웅이라도 상관이 없다. 개인주의 영웅들이 환영받는 일은 미국문화 속에서 충분히 이해가능한 일이다. 국가주의, 전체주의가 아닌 개인주의적 영웅은 서부개척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미국 전통의 한 부분이다. 배트맨은 미국적 가치가 반영된 아주 미국적인 초영웅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속으로 돌아온 '일지매'
한국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초영웅이 등장하는 만화가 있었다. 만화 원작의 영화들이 앞다투어 제작되는 현실에서 고우영 일지매는 원작의 인기를 업고 텔레비전으로 진출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던 고우영의 '일지매'는 1978년 고호 감독의 '날으는 소년 일지매'로 영화화되었다. 그리고 1993년 MBC '일지매', 2008년 SBS '일지매'로도 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MBC에서 '돌아온 일지매'로 방영되고 있다.
고우영의 일지매가 연재되던 시대는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 때문에 검열이 엄격했다. 시대풍자와 해학정신이 풍부하던 이 만화는 제대로 빛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등장인물이 북한 사투리를 쓴다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라는 우회적 배경과 인물로 사회비평을 대신해주었던 일지매에게 사람들은 통쾌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왜 한국사람들은 일지매에 열광하며, 한국의 초영웅은 미국과 어떻게 다를까? 일지매는 배트맨처럼 타고난 부자도 아니다. 일지매는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개천에 버려져 거지의 도움으로 살아난 인물이다. 이러한 출생배경 때문에 일지매는 누구보다 서민의 심정을 잘 헤아려줄 수 있었다. 각종 무술과 변신술을 연마해서 초영웅의 길에 들어선 일지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한다. 돈이 필요하면 나쁜 세도가에서 훔쳐내고 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배트맨이 개인주의적 영웅이라면 일지매는 공동체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지매는 단순히 악당을 혼내주고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부의 재분배까지 넘보고 있다. 힘없는 사람이나 서민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나 질나쁜 양반의 창고에서 보물을 훔쳐낸다. 일부는 그의 활동자금으로 쓰고 남는 것은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실천을 하는 일지매는 공동체적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속에 사는 약자들이 필요로 하는 걸 나눠주는 일지매가 배트맨보다 더 멋져보이기도 한다.
초영웅이 되기로 결심한 일지매가 가진 개인적 원한은 신분제의 최고층인 양반사회를 향해 있다. 자신을 버린 양반 아버지, 죄없는 달이를 정치적 이유로 죽여버린 이도 양반들이다. 양반은 권력을 이용해서 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힘이 있는 자가 지배하는 사회적 부조리가 바로 일지매가 타도해야 할 목표다. 한국은 계급혁명이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회지만 홍길동 같은 영웅이 환영받았던 걸 생각하면 일지매의 인기를 이해할 수 있다.
국가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국에서 반국가적 초영웅은 반역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지매는 혁명가가 아니라 단지 못된 양반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들을 괴롭힌다. 비리가 드러날까 두려워 신고도 하지 않는 양반들 덕분에 일지매는 유유히 양반집 담을 넘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일지매는 돈없고 힘없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강자를 골려주는 통쾌한 초영웅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한국이 자본계급사회로 급격하고 변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일지매의 존재는 더 빛난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재벌, 조직폭력, 악독한 고리대금업자가 넘쳐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일지매에 대한 인기가 커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래서 '돌아온 일지매'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카리스마있는 초인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이나 경제위기와 더불어 정치적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 배트맨과 일지매는 시청자들을 현실을 넘어서는, 어디엔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판타지 세계로 안내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분노가 극에 달할수록 이런 스트레스를 환상 속에서나마 대신 풀어줄 수 있는 초영웅의 활약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