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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맑은 마음으로 : 새로 나오는 책 하나를 살 때에는 언제나 전화로 먼저 주문한 다음 사러 간다. 전화 없이 찾아가도 들어와 있곤 하지만, 안 들어오는 날도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주문을 하는 책은 그 책방 일꾼도 좀더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늘 찾아가는 책방은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 미리 이야기한 책을 받고, 아저씨와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는데, 아저씨가 넌지시 한 마디를 한다.

 

 "(책마을 사람들이) 맑은 마음으로 책을 만들면, 사람들이 맑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014) 대한민국 헌책방 문화는 : 한 달 내내 쉬는 날 거의 없이, 또는 한 해 내내 쉬는 날 거의 없이, 하루 열넷∼열여섯 시간을 일해도 100만 원 남기기가 빠듯한 우리 나라 헌책방들. 이 헌책방을 찾아오는 책손 가운데에는 으레 한 달에 200∼300만 원은, 아니 400∼500만 원은 거뜬히 버는 사람들이 많다. 헌책방 임자는 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책값으로 500원 더 받는 일을 힘들어하면서 그냥 눅게 팔지만, 한 달 벌이 넉넉한 책손은 '단돈 1000원도 못 깎느냐'면서 화를 내고 큰소리를 내고 그예 에누리를 해내고 말아, '자기한테 참으로 좋다고 하는 그 책'을 '싸구려로 깎아내린' 다음 사 간다.

 

 

(015) 책마을 일꾼과 좋은 책 하나 : 밥집에서 일하는 사람 스스로 손님한테 내놓아 파는 밥이나 반찬을 맛있게 먹는다면, 적어도 그곳은 갈 만한 밥집이라고 볼 수 있다. 밥집 일꾼을 가만히 살피면, 팔기만 하고 안 먹는 사람이 꽤 있곤 하다. 손님한테 차리는 밥과 당신들 먹는 밥이 다를 때가 있다. 그런데 밥집 일꾼 스스로 당신들이 장만하여 내놓는 먹을거리에 쓰인 곡식과 나물과 고기가 얼마나 좋고 나쁜지를 모르는 사람이 퍽 많다. 풀약을 얼마나 치고 항생제와 비료를 얼마나 뿌렸는지, 방부제는 얼마나 깃들었는지 헤아릴 줄 아는 마음그릇은 참으로 적다. 아무렴, 사먹는 손님부터 곰곰이 돌아볼 줄을 모르지 않는가.

 

 책을 엮어내는 책마을 사람들이 당신 스스로 엮은 책을 시중 책방에서 제값을 고스란히 치르면서 둘레 사람한테 기꺼이 선물하는 모습을 곧잘 본다. 그러나, 으레 창고에서 한 권 꺼내어 주기 일쑤이다. 선물받는 사람은 거저로 받아서는 안 되나, 주는 사람 뜻이 고마워 그냥 받기도 할 테지만, 주는 사람 뜻을 좀더 널리 헤아린다면, 한 권은 앞에서 받고, 나중에 이 책을 기꺼이 책방에서 한 권 더 사서 다른 이한테 선물을 할 수 있어야지 싶다. 그 책이 겉과 속 모두 알차고 아름답고 싱그럽다면. 그 책은 책에 적힌 값 그대로 치르면서 장만하여 읽고 새길 만큼 훌륭하며 좋다고 느낀다면.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만든 사람도, 책을 파는 사람도, 자기 손에 쥐어드는 책은 판권이나 뒤쪽에 적힌 책값 그대로 치르면서 장만하여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책은 책이라 하기 어렵다.

 

 

(016) 어릴 적 읽던 책 : 내가 어릴 적에 좋아하던 책을 지금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릴 적에 좋아하던 책 가운데 지금 보아도 더없이 좋고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기꺼이 다시 사서 선물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책이라면 지금 아이들도 좋아하면 얼마나 기쁠까. 그렇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예 좋아하기만 하던 책이었는데, 이제 와 돌아켜 보았을 때 아주 형편없고 구질구질한 책이었다면 요즈음 아이들이 이런 책에 쉬 빠지지 말고 멀리할 수 있으면 반가울 텐데.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 또한 철없던 지난날 나처럼 형편없는 책에 빠져들 테지. 요즈음 아이들 또한 책읽기를 옳게 이끌어 주는 어버이가 없다면, 옳은 책과 썩은 책을 가려낼 줄 아는 눈길을 키우지 못하는 가운데 어리고 맑은 그 나날 동안 머리와 가슴에 담아 놓는 책을 아무렇게나 받아먹거나 집어넣고야 말 테지.

 

 

(017) 헌책방 같은 구질구질한 일 : 스물여덟 나이에 헌책방 장사에 뛰어든 어느 헌책방 사장님이 처음 겪은 일 가운데 하나를 듣다. 당신도 아버지 따라서 헌책방 일을 하겠다고 말하니 모두들 말렸다는데, 그때 어느 친척 분은, "그런 구질구질한 일을……" 하면서 말렸단다. 그 뒤로 그 친척 분과 부러 멀리했다고 하는데, 한 집안에서 누군가 헌책방 장사를 오래도록 이어나가면서 우리네 책 문화에 이바지한 뿌리와 흐름을 고이 지킨 줄을 모른다고 하여도, 헌책방에서 어떠한 책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모른다 하여도, 헌책방이란 대단하지 않은 곳이며 여기서 하는 일이란 하찮거나 보잘것없다고 여긴다 하여도, 헌책방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걸맞지 않으며 돈벌 생각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하면서 말릴 수밖에 없었을까. 차마 말려야 한다면, 좀 듣기 좋은 말이라도 하면서 말릴 수 없었을까.

 

 

(018) 주례 서는 헌책방 아줌마 : 2003년 봄, 내 혼례잔치 주례를 헌책방 아주머니한테 맡긴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한 말씀. "아유, 나한테 말만 하면 얼마나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은데……. 아유, 게다가  여자가?" 바쁘고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통에 혼례잔치에서 주례를 서 준 헌책방 아주머니 말을 나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앞자리에 앉은 가까운 내 친척 가운데 한 분은 나중에 "아주 좋은 말을 잘 들었다"면서, "참 좋은 사람을 주례로 불렀구나." 하고 이야기해 주었다.

 

 

(019) 문닫은 도서대여점 : 시골에서 문닫은 도서대여점에서 '아도'를 친다면서 책을 뺀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이만 권쯤 되는 만화책을 50만 원을 불렀고, 안 산다고 하니 40만 원을, 또 안 산다고 하니 30만 원을, 그래도 안 산다고 하니 20만 원을 불렀고, 그래도 살 마음이 없다고 하니 거저 가져가라고 했단다. 어서 이 책들을 치워야 하니 폐휴지 모으는 사람이든 누구든 좋으니 얼른 다 좀 가져가 주면 좋겠다고 했단다. 짐차에 한 가득 실은 만화책을 불쏘시개로 쓰려고 가져온 분한테서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닫은 도서대여점 만화책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장서라고 하는 책들은, 오래도록 학자로 일하다가 숨을 거둔 분이 집에 모셔 놓고 있던 책들은, 또 …… 이러저러한 책들은,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대접을 받으며 마지막 자리에서 이슬처럼 사라지게 되는가 싶어 서글퍼졌다.

 

 

(020) 청계천까지 다 뒤져 봤는데 책이 없어요 : "청계천까지 다 뒤져 봤는데 책이 없어요." 하고 말하면서 신촌에 있는 어느 헌책방으로 와서 "이런 책 있나요? 저런 책은요?" 하고 묻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이 묻는 책이름을 가만히 들어 보니, 한두 가지 책을 빼놓고는 모두 지금 새책방에서 팔고 있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이 어쩌다 헌책방에 들어올 수야 있지만, 그 어느 새책방에 가도 있는 책을 구태여 헌책방에서 찾으려고 하니 보이겠는가? 나오겠는가?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청계천 헌책방에도 찾는 책이 없다"고 함부로 뇌까릴 수 있는가? 이렇게 뇌까려도 되는가?

 

 헌책방을 돌고 돌며 뒤지고 뒤졌는데에도 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기다리라는 뜻이다. 더 찾아보라는 뜻이다. 다 뒤져서 안 나오는 책이란 있을 수 없다. 좀더 찾아보아야 하고,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 내가 몇날 며칠 전국에 있는 모든 헌책방을 다 뒤진다고 해서 바라는 책을 다 찾아낼 수 있다면, 무엇하러 허구헌날 헌책방을 쏘다니면서 여러 해에 걸쳐서 책 하나 만나려고 애쓰겠는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하루아침에 '자기가 바라는 책'을 손쉽게 찾아낸다면 헌책방 임자들도 좋겠지. 장사가 잘 될 테니. 헌책방 임자들이 당신들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고 귀찮고 게을러서 '책손이 바라는 모든 책'을 당신들 책방에 안 갖춰 놓겠는가. 헌책방을 찾아왔다면 헌책방에 있는 책을 살피고 구경하고 사야 한다.

 

 

(021) 밥과 책과 똥오줌 : 맛있고 몸에 좋은 먹을거리는 냠냠짭짭 즐겁게 먹은 다음에 반드시 배속에서 잘 삭여서 똥오줌으로 내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배가 터져 죽는다. 알차고 훌륭한 책은 즐겁고 신나게 읽어내어 마음과 머리로 삭인 뒤 실천으로 옮겨서 펼쳐야 한다. 안 그러면 머리와 마음에 지식조각이 썩어문드러지면서 바보나 얼간이가 되어 버린다.

 

 

(022) 밥과 책 : 밥을 왜 먹나? 일하거나 놀려고 먹지. 책을 왜 읽나? 무얼 하며 일하거나 놀아야 좋은지 알아보려고 읽지.

 

 

(023) 한 권이라도 : 한 권이라도 반가운 책을 만날 수 있다면, 오늘 하루 책방 나들이는 뿌듯하고 즐겁게 마칠 수 있다.

 

 

(024) 경주와 책 : 책 꾸미는 일을 하는 선배와 술잔을 부딪히는데, 선배가 한 마디. "야, 경주에 관한 책을 디자인하려는데 경주에 한 번도 안 가 보고 디자인할 수 있겠냐? 편집자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경주에 안 가 보면서 경주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꾸미고 엮는 사람이 많다. 헌책방에 가 보지 않고서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다. 골목길을 디뎌 보지 않고서 골목길이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사람이 많다. 아니, 가 본다고 하여 알겠는가. 살아내야 알지. 그런데, 살아낸다고 해도 알겠는가. 살면서 그곳에 녹아들어야 알지. 그러나, 살면서 녹아든다고 하여도 제 삶을 어떻게 붙잡거나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앎과 모름이 갈린다. 경주에 가 보지 않고서 경주를 이야기하는 책을 만드느라 어수룩하고 어설프게 되기도 하지만, 경주에 가 보고 경주를 이야기하는 책을 만들면서도 모자람과 섣부름이 짙게 드리워지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책, #책말, #책읽기, #헌책방,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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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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