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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의 마비와 감성의 부재에 대하여

도서출판 <이레>에서 출판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앞표지
▲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도서출판 <이레>에서 출판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앞표지
ⓒ 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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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는......제 말은......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p.119)

한나의 이 물음은 재판장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물음이 아니라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자국인 독일 국민들에게 또한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향해 던지는 화두이다. 지독하리만치 명확한 답이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물음 앞에서 형편없이 주저하고 치졸하게 훈계하는 판사의 모습은 기실,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모습은 아니다.

복수심도 아니고 방해가 되어서도 아니며 명령을 하달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위협했거나 공격해서도 아닌 그저 나에게 맡겨진 일을 했을 뿐 그들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던 독일인 트럭운전수의 술 냄새는 이미 그에게만 국한된 악취가 아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졌을 때 그 상황이 지속되고 반복되고 되풀이 되어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결국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채 감동도, 죄책감도, 책임감도, 수치심도 모두 잃어버리고 무감각과 무관심, 외면, 묵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한나가 그랬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당시의 독일인들이 그러했으며, 대동아 단결을 외치며 아시아인들을 도륙한 일본인들의 그러했고,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며 이주노동자들을 학대하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차별하는 우리네 모습이 그러하다.

(2) 열등감과 죄의식, 성장에 대하여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이 앞만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만하고, 상처받고, 길 잃은, 그리고 한없이 피곤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p.176)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나' 곧 미하엘 베르크가 묘사하는 한나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며 동시에 부지런하고 강인한 여성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문맹이라는 것. 한나는 이를 감추고 은폐하기 위하여 외톨이가 된 채 화내고 울고 소리치며 살아왔고 결국은 종신형마저 감수하게 된다.

한나의 이러한 행동이 일면 수긍이 가는 것은 왜일까. 들키고 싶지 않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 안에 잠재된 열등감으로 인하여 우리 또한 다른 방식으로 화내고 울고 소리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맹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느니 차라리 종신형을 선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 혹은 은폐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자신의 이미지나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 안에 뿌리내린 채 곪아버린 열등감의 악취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글을 익히기 시작한 한나는 점차 자신의 열등감을 치유해 가면서 스스로가 행했던 죄악을 마주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치유이자 성장이고 동시에 또 하나의 아픔을 가슴 속에 심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한나의 모습 속에는 전범 독일의 모습과 전후 독일의 모습이 뚜렷이 투영되어 있다.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아픔의 귀결이기도 하다.

(3)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p.201)

열다섯 소년과 서른여섯 여인의 사랑은 참으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남성과 남성의 사랑, 여성과 여성의 사랑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과 독일인의 사랑만큼이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인간 관계'에 대한 조금은 극단적인 은유 곧 메타포(metaphor)로 작용한다.

어쩌면 <더 리더>의 저자 슐링크는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나름의 소통과 교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안부 한 마디 없는,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는 책의 낭독 소리에 감사와 감동, 이야기와 사랑이 오고 간다. 후회한다고 해도, 고통스럽다고 해도,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은 쉽지 않은 관계의 구성 속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철학적 사유를 소설 <더 리더>를 통해 발현하고 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시공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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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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