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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랫입술이 약간 부르터 있었다. 바쁘다는 증거이자, 힘들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1997년 11월 '호남당', 'DJ당'이라는 소리를 듣던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에 입당해 그 당의 후보로 영남에서 출마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이른바 옷로비 사건 등이 터지면서 영남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난 혼자 살겠다'는 게 아니고 지역민심을 부분적으로 뒤집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내려온 이후 계속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분위기가 아주 나빠져 버렸죠. 29%의 개인적 지지를 받은 상태에서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엊그제 <내일신문> 기사를 보니까 덕천동에서는 7% 미만이더라구요. 그렇게 변했어요."

 

부산에서 세 번째 도전에 나서다

 

노무현 후보는 1999년 2월 9일 "16대 총선에서 부산·경남지역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승부사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출마선언 직후 월간 <말>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결심을 밝혔더니 다들 미쳤다고 하데요. 그런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역감정을 깰 수가 있나요? 미쳐야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역갈등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맙니다. 똑같은 사실도 지역을 오가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가 어디 있고, 보수가 어디 있으며, 정당 간의 정책 경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노 후보는 내리 두 번이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낙선의 쓴 잔을 마셨다. 1992년 14대 총선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가 그랬다. 그리고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그런데 편안한 길을 놔두고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부산에서 출마하겠다고 나섰으니, 주변 사람들이 '무모한 도전'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훗날 부인인 권양숙씨는 "종로에서 한번 더 당선된 뒤에 부산으로 내려갔으면 싶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 출마를 선언하고 부산 북·강서을에 내려온 지 300일이 넘었던 2000년 1월 10일. 영남지역 민심 취재차 부산에 들렀던 나는 노 후보의 선거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겨울 햇살이 따사로웠던 오후 3시였다. 그의 표정에서는 '반DJ 정서' 때문에 고전하는 분위기가 짙게 배어났다.

 

"공세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쪽(호남지역)은 90%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부산은 괄시받는다' 등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KAL기(대한항공) 제재하는 것은 아시아나 봐주기다'는 얘기부터 '신창원이 호남사람이라 안 잡는다'는 얘기까지요. '중장비는 호남에 다 가 있다'는 얘기가 사리에 안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호남은 90%인데 그쪽이 먼저 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 또는 '(호남)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으면 영남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지역주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상대지역에 미루는 겁니다."

 

노 후보의 증언대로 당시 영남지역엔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정권교체로 '전라도 세상'이 됐다"는 영남지역의 정서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이(DJ) 정권이 맘에 안 든다"는 것이다. 

 

노 후보가 14대 총선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내리 패배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역주의 정서'였다. 그가 정치개혁의 제1과제로 '지역주의 극복'을 거듭 강조해온 것도 이런 정치적 경험과 밀접하다. 그가 당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내놓은 대안은 '중선거구제'와 '복합선거구제'.

 

"소선거구제는 악수로써 당선이 가능합니다. 악수로써 당선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돈을 뿌려서 당선될 수 있다는 얘기와 통하죠. 하지만 중선거구제로 가면 악수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높아져요. 국회(의정활동)에 충실한 사람은 미디어에서 뜰 수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중선구제가 나은 제도임에 틀림없는데 다만 소지역주의 폐해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합선거구제도 검토해 볼만했습니다. 소지역주의가 있을 만한 곳은 소선거구제를 적용하고, 그렇지 않는 지역은 중선거구제로 갈 수 있어요."

 

노 후보의 깜짝 정계은퇴 발언... "이번에 깨지면 정치는 정리해야죠"

 

'제도개혁'의 무산에 아쉬움을 토로하던 노 후보는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실패 경험에서 나온 울분이기도 했다.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하겠지만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면 헌신적이고 도전적인 정치인, 즉 자기 몫을 내던지고 시대적 과제에 도전하는 정치인이라도 있어야죠. 그리고 그런 정치인을 선택하는 민의가 있을 때 지역주의가 해소되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그런 실험을 회피해가고, 많은 유권자들이 그런 실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매도하는 상황 속에서 지역주의에 대한 대책을 얘기한다는 것이 우스운 것 아닌가요. 지역주의에 대해 솔직해지기를 바랍니다. 지역주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지역주의를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노 후보가 서울 종로에서 부산으로 내려간 목표는 명확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고 성공하는 정치인'의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997년 10월에 만났을 때 "돈키호테처럼 현실적 감각이 없는 놈이 대중적 지지를 받아 성공하는 모델이 대중적 의식을 바꾸고 정치인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부산 출마에는 '대권 도전의 꿈'도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주의의 벽은 두터웠다. 노 후보조차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명분으로는 민심을 건드릴 수 없으니까 각종 민원들을 해결해주면서 민심을 얻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라로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지금 하고 있는 도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아주 센 답변이 나왔다.

 

"자신이요? 선언처럼 말할 것은 아니지만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서 성공하지 못하면 정치는 이제 그만 해야죠. 또 어디 가서 무슨 도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부산에서 두 번 깨지고 종로에 가서 특정 지역의 당표를 업고 당선됐습니다. 그리고 종로를 버리고 다시 돌아와서 도전하는데 여기서 또 깨지면 또 다른 데 가서 도전할 수 있어요? 없잖아요. 내 고향 부산에서 깨졌으면 깨진 대로 정치를 정리해야죠. 또 어디 가서 호남표 받아 당선돼서 다시 고향에 돌아와 '나 성공했소' 하며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장난도 아니고…."

 

이번에 낙선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폭탄발언'이었다. 노 후보는 지역주의 정서에 고전하고 있다면서도 "꼭 당선되겠다"고 말했다. 당선된다면 차세대 대권주자로서 그의 위상도 높아질 수 있었다. 그 역시 "여기서 당선된다면 당연히 차세대 주자로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개표 결과 노 후보는 2만7136표를 얻은 데 그쳤다.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는 4만464표를 얻어 1만3000여 표라는 큰 차이로 노 후보를 따돌렸다. 정치적 고향인 부산은  이렇게 내리 세 번이나 그를 선택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 후보가 정계를 은퇴한 것은 아니다. '바보 노무현'을 지켜주겠다고 나선 '노사모'가 버팀목이 되었다. 그들의 지지와 응원 속에 그는 '노짱'이 되었다.    

 

[인터뷰 어록] "그 사회의 통념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점차 그 느낌이 달라져요. 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많은 실패의 경험을 겪으면서 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사회의 통념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지 한 정치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정치권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말을 유권자들고 많이 합니다. 평소에 유권자들이 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판단기준을 선거에서도 적용해 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말 따로 투표 따로, 그러지 말고 책임있는 선택을 해 달라는 겁니다. 정치인들에게 당락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유리하면 지역감정도 부추기고 때로는 불법적인 일도 합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그 한표 때문에 당장 망하는 일은 없어요. …

 

정치인은 목숨을 걸어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유권자는 목숨 걸지 않아도 큰 출혈을 하지 않아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뭘 학교 동창 찾고, 인정 찾고, 친척 찾고, 지역분위기 찾고…. 우리 국민의 이해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로 정치를 망치냔 말입니다. 쓰지도 못할 사람들 당선시켜 놓고, 선거한 그 다음날부터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질 생각은 안하고 자기들이 뽑아 놓은 정치인에 대해 흥분하고 비분강개하는 이런 건 뭡니까. 좀 책임있게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그:#노무현 서거, #16대 총선, #부산 북강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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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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