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 보면 기억이 아득하다. 군부 독재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본 후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살아 날 것을 기원하였건만 결국은 5공 6공의 군홧발 정치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민주 투사라고 불리던 YS, DJ의 대통령 당선으로 민주화의 걸음마 시대가 왔었다. 그러나 그 정권들도 권위주위와 계급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였다. 건국 후 면면히 이어왔던 수구 보수 세력의 재집권을 방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다시금 생각들을 정리하니 내가 노무현을 지지한 이유일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청문회 사건들이 나로 하여금 시대의 불세출의 풍운아 노무현의 경선 역전 드라마는 나에게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와 결국은 노사모에 노란 저금통과 노란 리본을 단 그의 일꾼으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공학도였고 기업의 연구소에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샐러리맨이다. 매달 나오는 봉급으로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고 회사 일에 쉴 틈이 없는 내가 그의 선거 운동에 큰 도움을 줄 처지가 되지 못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대통령 후보 노무현의 지지자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매달 박봉이었지만 기십 만원씩 후원금을 보냈다. 몇 달 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노란 저금통을 지급 받아 회사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내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그를 홍보하였다.
나는 시골 마을 내 고모님 칠순잔치도 그의 당선을 도울 작정으로 주관을 하여 그 자리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였던 기억이 나기도 하고, 내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홀로 사시는 내 고모님 그리고 내 어머니의 외톨이 지원을 얻기도 하였다.
오늘 이렇게 내가 한 일을 내 손으로 기록하고 알리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이렇게 바보 노무현이 먼저 가시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무슨 대단한 일이었다고 무슨 대단한 돈을 희사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아무리 작은 일이지만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수구꼴통들의 허 수작을 더는 방관할 일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한나라당 후보로 두 번째 출마를 하여 노무현과 선거전에 되자, 나는 명색이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후손인데 문중 사람인 이 총재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전라도당 노무현을 지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다가 호되게 혼이 난 기억도 새롭지만, 결국은 시대의 풍운아 노무현이 이회창을 누르고 승리를 하여 그 수모를 견딜 수 있었다.
경상도 문둥이가 전라도로 변절한 노무현을 사랑한다고, 지지한다고, 내 동생들의 놀림도 받았고, 경제를 망친 대통령, 권위를 저버린 대통령, 고졸에 촌놈 출신, 머리 모양마저도 깍두기라는 칭호를 얻기도 한 못난 대통령, 말실수 많은 대통령이라고 사람들이 말 할 때 마다 나는 그 못난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으로 농담반 진담반으로 비난을 받아야 했으나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 공무원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공무원의 권위가 동사무소 말단 직원들부터 바뀌었고, 인터넷의 구축으로 편리하고 합리적인 사회의 시스템으로 변했다. 그동안 모든 기득권들이 사라지자 기득권 집단의 사람들은 불평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좋았다. 오마이뉴스의 시민 기자가 되어 사회 개혁에 필요한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하였고 인터넷 논객으로 이제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단 한 번도 대통령과의 소통이 없었지만, 나는 그가 하야하여 고향으로 내려오면 내가 사는 산청의 산골, 산막에 초대를 하여 막걸리 술대접에 하룻밤을 새워 그 좋아하시던 토론도 하고 싶었다. 마음이 그러하였지 그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몰랐다.
그는 여전히 경호원과 찾아오는 시민들에 개인시간이 없는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소시민인 촌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지도 못하고 부르지도 못한, 못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비리로 지난 몇 달을 간간히 전해들은 소식들이었지만 나는 한 가닥 믿었다.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진리를 말이다. 참으로 너무 하다고 했지만 노무현의 역풍으로 너희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기다리다 한 방을 먹이는 멋진 시대의 풍운아인 걸 믿어왔다.
저 지난해 대선에 나는 청와대 홈피에 대통령에 드리는 글을 한편 올렸다. 민주당의 다수 후보가 대선 후보자로 선출하는 경선을 할 즈음이었다. 아쉽게도 그들 중에게 내가 지지할 말한 사람이 없었다. 해서 대통령에게 청을 드렸다. 감히 무모하게도 당돌하게도 그에게 나는 문국현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청을 드렸다. 나는 당신을 운동해 준 대가를 이제는 갚아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그는 내 청을 심정적으로나마 들어 주리라고 믿었었다. 허나 그 글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선거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이기에 아무런 대답을 못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문국현 후보에게 노무현 후보시절처럼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헌금을 보내고 그냥 지켜보았을 뿐이다. 나는 문 후보를 노무현보다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한나라당의 MB만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또 민주당 후보들보다는 그가 선명하고 참신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하지 않고, 정해둔 방향으로 이렇게 흘러가는 모양이다. 나는 그날이 언제이고는 올 줄 알았다. 내 산막에 桃花가 만발하고 술 익는 냄새가 山川을 흐르는 훗날, 그를 모시고 세월을 노래하는 태평성대가 올 줄 알았는데... 다 꿈이 되고 말았다.
운명의 그 토요일. 전일과 마찬가지로 아침식전에 채전 밭 잡초를 뽑고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막는 밀짚모자를 쓴 채 밭 자락을 기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는 다급하게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부산대학교 양산병원에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가 없지만 뇌진탕을 서거하셨다는 방송 멘트를 말이다.
나는 설마, 설마 그러나 라디오 방송인데 속보라고 하는데 정규 뉴스에 정확한 보도를 하겠다고만 한다. 산막에는 텔레비전이 없기에 그것만이 유일한 뉴스 통로이다.
아내가 이내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호미 든 손이 떨리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냥 하늘만 쳐다 볼 뿐이다. 흐르는 눈물엔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애써 울음을 삼길 참이었지만 주체가 되지 않아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호미로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풀을 잡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호미 날로 땅만 헤집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는 자살을 한 것이라고 틀림없는 일이라고, 이렇게 날이 환한데 무슨 낙사를 할 일이 있냐고 말이다. 매일 나서는 등산로인데 나는 방송이 믿기지 않았지만 믿어야 했었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통제된 뉴스라는 걸 안다. 오랫동안 그런 세월에 익숙해져 살아온 우리들이 아닌가.
산청 산골에 사는 나는 하루를 온종일 보내도 사람 한사람 찾아오는 일이 드문 곳이다. 농번기라 농사일들이 많은 철인데 나는 안방에서 라디오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시시각각 변하는 뉴스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밤늦은 시간까지 그 긴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그냥 눈을 뜨자 집을 나섰다.
'사람사는세상'이라는 홈피에서 사진으로 보아온 봉화마을로 그냥 찾아가자. 가면 길이 보일 것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나올 것이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방황하다 열정의 길로 나섰다.
진영IC를 통과하여 진영읍을 지나 부산 가는 구 국도를 타고 가니 그만 안내판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차를 길가에 세우고 어느 시골 가게 앞에 선 아저씨에게 가는 길을 묻는데, 목이 메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로 가는 길을 묻는 노무현이라 단어 세 마디에 홀로 목이 메여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내 목소리를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이 설음을, 저 하늘만이 아는 일을, 가까스로 메인 목소리로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촌로의 아저씨는 먼저 알아차리고는, 참으로 감사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내 마음속을 먼저 읽고는, 아주 자세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경상도 시골 아저씨의 전형적인 사투리에 무뚝뚝함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4차선 도로를 따라 김해서 전영방향으로 내가 달려 온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형국이 되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봉화 마을 사저 가는 안내판이 보이는 우회전 길 앞에서 전투경찰을 만났다. 난 반가운 마음으로 안내판을 보면서 습관적으로 길을 물었는데 그 물음이 잘못 된 것은 몇 번의 헛일을 하고 나서였다.
그 전경은 길을 묻는 나에게 조문을 가는 차량은 이 길을 이용하지 말고 김해공설운동장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봉화마을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라는 지시였다.
그 시간이 아침 7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공설운동장에는 8시부터 버스가 운행되었던 것이다.
그럼 한 시간이나 기다리면서 오지 않는 버스, 안내되지 않는 시간표를 기다리며 나처럼 여러 사람들이 운동장 마당에 서성이고 있었다. 김해 경찰서와 시청의 처사는 대단히 무식하고 몰상식한 일이다. 허나 관공서의 일이란 것이 이런 경우가 허다한바 나는 계속 기다릴 수가 없어 다시 차를 몰고 지나온 길을 따라 경찰의 질문과 저지를 무시하고 봉화마을 입구는 공단근처까지 가서는 걷어서 갔다.
간밤에 조문을 다녀온 사람들이 삼삼오오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처럼 들어가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시간대였다. 저만치에 사진으로 만 보았던 봉화산 사자바위가 보이고, 길가에서 차량 유리창에 마음을 적은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마을 회관이 보이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노사모 사무실도 보이고.
나는 터덜터덜 내 고향 마을 어귀에서 밤을 새워 도착한, 젊은 시절 버린 고향을 뒤늦게 찾아온 늙은이 처럼 아무도 반기는 사람 없는 시골마을 길을 혼자 걸었다. 허나 모든 것들이 눈에 다 익은 곳이었다.
문상객이 겨우 쉰 여명 되는 줄에 서서 국화꽃 한 송이를 받아들고 차례를 기다린 후, 대여섯 명이 한줄이 된 상주 곁에 서서 절을 올릴 준비를 하는데 맏상제가 나에게 들리듯 말듯 말을 건넸다.
"술 한 잔 올리시지요."
예기치 못한 그의 물음에 나는 올려다보니, 아직은 앳띤 맏상제의 나이는 내 아들 또래 정도로 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가 건네는 잔을 받고, 술을 받고, 재배를 올리다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북받치는 통곡이 가슴에서 흘러나와 이를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고는 한참을 엎드려 울었다. 내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마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울다가 내가 절규하듯 내뱉는 속 깊은 통곡소리에 그들도 그만 동화가 되어 통곡의 바다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주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무 기억도 없고 아주 생각도 나지 않는 참으로 희한한 아침시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그 시간까지 시장하지도 않고 정신은 맑기만 하였다. 사저 주위에서 서성이다 화포천을 따라 난 길을 내려가니 저만치 바로 손에 잡힐 듯한 곳에 부엉이 바위가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바위가 비쭉비쭉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면이 고운 바위였다. 그 바위 수직 아래로 소나무들이 굽이굽이 자라고, 산자락이 없이 바로 논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 위에서 떨어지신 것이다. "저기 사람이 지나 가네. 라고 하시면서.. 지금 여기 서있는 나를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라고 하신 말이 떠오른다. 내가 답 한다
"그렇지요"
그렇게 내가 좋아한 바보 노무현은 나를 버리고 가셨다. 처음에 비보를 듣고 죽기는 왜? 다시 일어서 하셔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린 어찌 하라고 먼저 가셨나요?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라도 그렇다면 죽었을 것이다. 죽음밖에는 길이 없는데 어찌 살 것인가 말이다.
한주일이 다 지나 간다. 내일이면 영결식이고, 또 내일이면 우린 그를 잊을 것이다. 바보 노무현과 다른, 진짜 바보 우리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