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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 외국인이 기사 썼네?" 편집국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기사 거리가 안 되는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기사거리가 됩니다. 그 기사를 읽은 편집자와 독자는 치부를 들킨 듯, 얼굴이 화끈거려집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무릎을 치기도 합니다. 한국 속의 외국인 시민기자들, 그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이름부터 남다른 야마다 다까꼬(42)는 두 아이를 둔 일본인 가정주부다. 그러나 그녀를 더욱 남다르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외국인 시민기자'라는 타이틀이다.

 

야마다는 2007년 8월 11일, 첫 기사를 시작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다. 2년여 기간 동안 40개에 가까운 기사를 썼다. 기사 소재도 다양하다. 다문화가정 이야기, 외국인며느리가 겪은 이야기, 한일간의 문화 차이 등.

 

그 중 특히 지난 2008년 10월에 작성한 '차 사고로 죽은 딸...무서운 한국 횡단보도' 기사 는 어린이, 노약자가 불안을 느끼지 않고 건너가기 촉박한 한국의 횡단보도 문제를 본인의 가슴 아픈 사연을 거론하며 지적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야마다는 이 기사의 댓글에서 "사고 때문에 힘이 빠졌을 때, 고 이수현씨의 부모님께서 한일간의 가교가 되겠다는 아드님의 의지에 따라 일본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사업을 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감동을 받아 나도 지금부터라도 한일간의 가교가 될 수 있다면 마음으로 시민기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야마다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적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그녀만의 특별한 위치에서 다문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맹활약 중이다. 지난 7월 초, 인천 어느 공장 안에 마련된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에서 야마다를 만났다.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건물 안에서, 야마다는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었다.

 

일본인 가정주부는 왜 시민기자가 됐나  

 

야마다 다까꼬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야마다의 동네에는 재일교포가 많았다. 미군 기지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겨 야마다를 미군기지로 데리고 가곤 했다.

 

어른이 되서는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리고 1999년,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어느덧 한국 주부 생활 10년차인 셈이다. 지금은 어엿한 한국의 '아줌마'(혹은 '가정주부')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적응하기 힘들었을 터. 야마다는 가장 어려운 것으로 '가족 관계 호칭'을 꼽는다.

 

"일본은 전쟁 후에 개인 사회가 돼서 가족관계가 부모, 자식 이 정도인데, 한국은 가족 관계가 넓어요. 7촌, 8촌까지 있을 정도로. 처음에는 소개 받는데 가족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호칭 부를 때 어려웠어요."

 

이렇듯 그녀는 외국인 주부로서의 어려움을 기사화함으로써 다문화 가정 시민기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녀의 기사에는 주부로서의 생활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민기자로서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기사쓰기에 힘이 된 '생나무 클리닉' 닥터들

 

처음부터 야마다가 글쓰기에 관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기사를 쓰는 데는 더욱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한일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자 했던 야마다였기에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국에 사는 일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마이뉴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재팬 시민기자들이 딱딱한 내용보다는 개인적이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기사를 올린 것을 보고 저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야마다에게 또 한 번의 예기치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오마이뉴스> 재팬이 폐쇄된 것이다. 다행히도 야마다는 한국판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를 써왔던지라 크게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어학원 아르바이트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한글을 배운 실력으로, 그녀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해를 풀기 위해 꾸준히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썼다.

 

"검도가 한국에서 유래됐다는 내용으로 온라인에서 논쟁이 생긴 적이 있었어요. 그때 검도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기사를 쓰자고 다짐했어요."

 

외국인이 한국어로 기사를 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야마다는 의사소통에서 오는 오해를 피하고자 메일로 인터뷰를 하고, 한국 기사를 읽으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의욕적인 야마다에게 가장 힘이 된 건, '생나무 클리닉' 닥터들이란다.

 

"생나무 클리닉에 질문을 올렸더니 직접 전화로 답변을 주셨어요. '열심히 하세요' 하고 격려까지 해주시니까 힘이 됐지요. 한국어 쓰는 거 자신 없었는데 한 번 해볼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하여 현재 그녀가 작성한 한국어 기사는 총 40건. 언어장벽과 주부로서의 빠듯한 가정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틈틈이 그녀의 주변과 다문화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하지만 기자의 칭찬에 야마다는 오히려 '기사 많이 못 썼는데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며 쑥쓰러워했다.

 

다문화 예비 강사로서 야마다 다까꼬

 

그러나 그녀의 활동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야마다는 다문화 강사가 되기 위해 매주 월요일마다 다문화 이해 수업인 '이주 여성자 모임'에 나가고 있다. 그리고 오는 9월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부평 '인천 여성의 전화' 사회단체에서 다문화 강사 교육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미디어 교육, 문화의 거리에서 다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등 크고 작은 다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활동들이 과제할 시간도 부족한 야마다에게 벅차기도 하지만, 그녀는 이를 통해 한국에서 이주민으로서, 다문화 가정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주체적으로 사회를 바꿔나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다문화 강사가 되기 위한 과정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다문화 사회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다행히도 다문화 가정의 상황은 점차 나아지고 있는 추세다. 작년 다문화가정법이 진행되면서 한글 교육을 받는 것도 쉬워졌다. 예전에는 비싼 돈을 내고 대학에서 한글을 배워야 했지만, 이제는 도서관에서도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취업문제와 관련해서는 고용자 측의 입장과 더불어 피고용자 측의 입장이 주체적으로 반영돼야 한다고 야마다는 말한다. 그리고 결혼 이민자 환대 문화가 확산돼야 한단다.

 

그녀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주 여성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기사로 작성하고 있다. 그녀는 "이민자로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오마이뉴스> 등의 인터넷 사이트다. <오마이뉴스>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장소다"라고 말했다.

 

한편 야마다는 외국인 시민기자 릴레이 인터뷰에 큰 관심을 보이며 '다문화 기자단'과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외국인 시민기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사회를 위하여

 

인터뷰가 끝나고, 야마다와 함께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의 가운데 방으로 갔다. 방을 둘러싼 하얀 벽에는 이주민들이 자신의 언어로 적어놓은 소망들이(소망을 적어놓은 글씨들이) 가득했다. 야마다도 붓을 들어 글씨를 적었다.

 

벽에 쓰인 글씨가 어떤 이에게는 낙서로 보이겠지만, 필자에게는 벽에 쓰인 알록달록 색깔의 글씨가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다문화인들과도 이렇듯 어우러지는 대한민국, 그것이 바로 일본인 시민기자 야마다 다까꼬가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

 

앞으로 다문화 강사가 되어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될 야마다. 그녀의 기사가 다문화 사회에 커다란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태그:#야마다 다까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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