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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오는 날 자전거로

혼자서 살 때하고 둘이서 살 때하고는 크게 다릅니다. 혼자서 살 때에는 비 퍼붓는 날에도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신나게 헌책방마실을 하든 먼나들이를 떠나든 곧잘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아닌 둘이 살 때에는 홀로 멋대로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지 못합니다.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함께 타야 한다 할 수 있으니 그럴 테지만, 혼자 꾸리는 살림이 아니라 같이 꾸리는 살림이니, 한 사람이 빗길에 고뿔이라도 걸리면 다른 한 사람이 질 몫이 커집니다. 혼자 살면서 몸이 아플 때에는 더 서럽다지만, 혼자 살면서 아프면 혼자 겪거나 치를 뿐인데, 둘이 살면서 몸이 아플 때에는 내 몸뿐 아니라 옆지기 몸까지 고되게 하고 맙니다.

혼자 지내는 나날에는 더 많은 헌책방을 더 자주 찾아다녔고, 더 많은 책을 더 오래도록 읽고 삭이면서 마음밭을 일구었습니다. 혼자 아닌 둘이 지내는 나날에는 더 적은 헌책방을 겨우 틈을 쪼개어 찾아다니고, 더 적은 책을 더 적은 틈을 가까스로 내며 읽고 되새깁니다. 애써 사들여도 미처 못 읽고 마는 책이 있는데, 이렇게 못 읽고 쌓이는 책이 늘며 가슴이 무거운 한편, 이제는 예전과 달리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어울림에서 얻고 배우는 대목이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게 되어 책을 즐겨읽고 있습니다만, 책에 담긴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른 꿈을 안고 다 달리 살아온 이야기를 담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사람 삶을 헤아리거나 읽지만, 책 아닌 사람을 만나면서도 사람 삶을 헤아리거나 읽습니다. 그리고, 나와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던 사람하고 함께 살면서 새로운 눈길과 마음길로 사람 삶을 헤아리거나 읽습니다. 더구나,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곳부터 큰 곳까지 내 모습을 비추어 보여주는 가운데, 내 좋고 나쁜 구석을 하나하나 느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혼자서 책을 즐길 때에는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말해 왔다면, 같이 살 때에는 같이 생각하고 같이 말하게 된달까요. 한 번 생각하고 말하던 이야기를 두어 번 곱씹게 되고, 두어 번 생각하던 일은 열 번쯤은 곱씹게 됩니다.

다 다른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살아가려 하는 데에는 이런 뜻과 좋음이 있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때때로 날카롭게 부딪히면서 마음이 다칩니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다칠 일이 아니지만, 마음그릇이 작은 사람이 마음이 다칩니다. 그러면서 마주한 사람 마음까지 다치게 합니다. 속이 좁은 책벌레는 혼자서 꿍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비가 퍼붓는 날씨인데 자전거를 달립니다.

한참 비를 맞고 길을 달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전철역으로 갑니다. 자전거 바퀴를 떼고 전철을 탑니다. 고3 수험생이면서 자율학습을 떼어먹고 헌책방마실을 하던 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고 살면서 짐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 헌책방마실을 하던 때를 떠올립니다. 마음이 무거운 나날 으레 찾아가던 헌책방이 아니었는가 생각하면서, 내 마음쉼터로 가자고 다짐합니다.

겹겹이 책탑이 이루어져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
 겹겹이 책탑이 이루어져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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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책 하나로 길을 찾는 사람을 책으로 만나기

자전거를 태운 전철은 대방역에 닿습니다. 대방역에 내려서 노량진에 있는 헌책방 〈책방 진호〉에 들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자전거를 달려 용산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으로 갑니다. 오랜만에 한강다리를 자전거로 넘습니다. 비를 맞고 자전거로 달리는 맛이 싱그럽습니다. 다른 생각은 말고 자전거를 달리고, 자전거가 멈추는 곳에서 책을 쥐자고 생각합니다.

비가 쏟아지니까 자전거도 책방 앞에서 비를 맞아야 합니다. 자전거한테 미안한 노릇이지만, 오는 길에도 비를 맞았으니 그예 맞을밖에 없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전철에 사뿐히 실어 주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닦아 줄 테니 참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비옷을 벗어서 책방 문간에 걸어 놓습니다. 가방 안쪽까지 빗물이 스며들지는 않았습니다. 한숨을 돌리며 책방 계단을 디디며 밑으로 내려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둘러봅니다. 맨 먼저 《김성재-출판 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라는 책을 꼽아 듭니다. 1999년에 처음 찍은 뒤로 다시 찍었을까 궁금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나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분들이나 이 책을 알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모르는 분도 많고 아는 분도 있을 테지요. 저 또한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 책이 있는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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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를 쓴 김성재 님은 '학원사' 편집장과 서울신문사 교정부 차장 들을 거쳐 1956년에 '일지사'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이 1999년에 나왔으니, 자그마치 마흔세 해에 걸쳐 출판사 한 곳을 꾸려 온 이야기를 담아냈다 하겠습니다.

.. '출판인'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1887년에 개정한 출판조례부터 '발행자'로 바뀌었는데, 1893년에 제정된 출판법이라는 악법에서도 '출판인' 대신 '발행자'라는 말을 썼다. 이 출판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5년 9월 27일에 악명 높던 신문지법과 함께 그 효력이 정지되고 몇 년 후 폐지됐다. 그 뒤로도 '발행자'라는 말은 일본이나 우리 나라의 서적 간기면('판권면'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에서 계속 쓰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 간기면에서는 더 부드러운 순 우리 말인 '펴낸이'이라는 말도 아울러 쓰고 있다. 일본에서 신문이나 잡지 등을 규제하기 위해 1909년에 제정한 신문지법에 처음으로 등장한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따위 말들도 우리 나라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에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와 게재 요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잡지 간기면에는 아직까지도 이 말들로 게재해야 한다 … 그리고 마치 '인(人)' 자가 붙은 '발행인'이 '자(者)' 자가 붙은 '발행자'보다 더 대접을 받아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도 있다. 이는 '편집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편집자 중 책임을 지는 이를 법률로 정해 이르는 명칭인 '편집인'으로 불러 주는 걸 그들이 더 선호하거나 스스로 그렇게 부른다면 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들은 출판자나 편집자를 비롯한 언중이 말 하나하나에 신경을 덜 써 왔을 뿐 아니라, 사전들의 풀이도 잘못돼 있기 때문에 말미암은 일이 아닌가 싶다 ..  (11∼12쪽)

한 줄 두 줄 차근차근 읽어 나갑니다. 1950년대부터 책을 만져 온 분이 느끼고 보고 생각한 이야기를 받아먹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제대로 알기 어려운 대목을 생각해 보고, 지난날부터 책쟁이 한 사람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던 삶자락을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책쟁이 김성재 님이 이 책에 이렇게 이야기 몇 자락 남기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못 알아채거나 못 느꼈을 책마을 흐름과 우리 세상 흐름을 돌아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고쳐 말하고, 나아가 '장애우'라 고쳐 말하는 흐름 또한 '편집자'를 '편집인'으로 고쳐 말하는 흐름하고 매한가지이구나 싶습니다. 말끝 하나 바꾸며 어느 한 사람을 섬기거나 받든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끝 하나 바꾸어 놓는 일로만 그치며 정작 우리 삶터와 사람들 매무새는 그대로 내버리는 셈이기도 합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따돌리는 얼거리를 뜯어고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매무새를 바로잡는다면, 어떤 이름으로 장애 있는 사람을 가리키든 말썽거리가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 이러한 의지로써 양질의 책을 내고 있다면, 비록 일 년에 한두 권밖에 내지 않더라도 그 출판사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물론, 양질의 책을 지속적으로 많이 내고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한편,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자연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코 높이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  (16쪽)

묶여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돌아봅니다.
 묶여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돌아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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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에 수백 수천 가지 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있는 일이 나쁘지 않을 테지만, 한 해에 한 권만 내더라도 수백 수천 갈래 출판사가 있을 때가 한결 아름답지 않으랴 생각해 봅니다. 출판사 한 곳에서 훌륭한 책을 꾸준하게 많이많이 펴내는 일도 나쁘지 않을 터이나, 출판사마다 한길을 꾸준하게 팔 수 있는 사회문화 틀거리가 마련되어 있으면 좀더 즐겁지 않으랴 생각해 봅니다. '더 많은 좋은 책'도 나쁘지 않으리라 봅니다만, '좋은 책 하나 더 깊이 읽기'를 나눌 수 있는 터전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 이 책(가람 이병기 선생이 쓴 《국문학개론》)의 원고는 대학노트 네 권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멋진 붓글씨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성들여 썼단 말인가. 주옥 같은 시조를 써서 예술의 높은 경지를 개척한 가람은 원고 자체도 예술품으로 결집시킨 것이다 ..  (39∼40쪽)

나날이 '손으로 글쓰기'가 잊혀지거나 사라집니다. 종이에 찍어서 내는 책이지만, 편지에 글을 적어 청탁서를 보내 오는 일이란 없고, 청탁서를 받고 나서 손으로 글을 써서 보내는 일 또한 없습니다. 저 또한 제 글을 셈틀로 쓰며, 인터넷에 띄우고, 한글파일로 엮어 출판사로 보내 줍니다.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보낼 때에도 요사이는 우표가 아닌 스티커를 붙입니다. 해마다 여러 가지 새 우표가 꾸준히 나오기는 하는데, 우표를 붙여 도장 꾹 눌러 편지를 보내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체국 일꾼한테 따로 '이 편지는 우표를 붙여 도장을 찍어 주셔요' 하고 말해 주어야 비로소 해 줍니다.

기계한테 손일을 맡기고, 기계가 사람 시늉을 하면서 손맛 비슷하게 따라합니다. 기계가 사람일을 거의 도맡으면서 우리 손길을 타는 삶자리가 줄어들고, 손때 묻은 터전은 뒤로 밀려납니다.

.. 독자의 비뚤어진 잠재 욕구에 영합해서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대수롭지 않은 내용의 것을 막대한 광고비를 써서 시장을 조작하고 독자를 현혹시켜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책도 있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매스컴이 베스트셀러를 많이 거론한다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는 것까지 독자에게 홍보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 … 우리의 출판도 규모의 경제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쩌다 듣게 된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의 입에서 나오니 탈이다. 전형적인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에 의거하는 출판이 규모의 경제만으로 이룩될 때 과연 출판의 질은 어떻게 되겠는가 … 한국에 있어서도 다른 산업자본이 출판계에 손을 뻗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출판 기업은 위험을 느끼는 시대가 닥쳐올 것만 같다 … 출판은 '질의 산업'이어야지, 결코 규모만의 산업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양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질을 중시한 결과로서의 양이 아니고서는 출판계의 참된 번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53∼55쪽)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부피가 아닌 속알맹이'를 챙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에도 똑같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을 때에도, 우리 스스로 즐길 놀이를 찾을 때에도, 물건 하나를 장만하든 물건 하나를 만들어 팔든, 부피가 아닌 속알맹이를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알맞고 알차게 차려서 알맞고 알차게 먹어야 좋은 밥이요, 많이 차려서 많이 먹는다고 좋은 밥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알맞고 알차게 마련해서 읽어야 좋은 책이요, 많이 마련해서 많이 읽어야지만 좋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책방 아저씨는 모든 손님한테 차를 한 잔씩 대접해 줍니다.
 책방 아저씨는 모든 손님한테 차를 한 잔씩 대접해 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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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춤법이 시원찮게 바뀌었기 때문에(1989년에) 눈에 거슬리는 표기에 신경이 쓰이는 까닭이다. 그 대표적인 것에는 학리에 맞지 않게 '더우기', '일찌기'를 '더욱이', '일찍이'로 바꾼 것이라든가, 두 음절로 된 한자어 사이에서 소리나는 사이시옷을 여섯 개에 한정시켜 받쳐 적게 함으로써 문법 체계를 무너뜨린 따위가 있다. 또, 모음조화가 허물어진 것도 억울한 느낌이지만, 보조용언을 붙여 쓰는 걸 허용한 것도 마땅찮다. 이통에 한 책에서 보조용언을 붙인 것도 있고 띈 것도 있는 책이 수두룩하다. 맞춤법은 남북통일 후에나 바꿔야 하는 거였다. 그건 그렇고 다시 강조하거니와, 편집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게 교정이다. 대단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할 일이며, 종이 뒤쪽까지 꿰뚫어볼 만한 안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는 작업니다 ..  (89쪽)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밀어붙이고자 하는 '서울-부산 물길'이든 '4대강 정비'이든 이런 일을 꼭 해야 한다면, 오늘 이때에 밀어붙여서는 안 될 일이며, 남과 북이 하나가 된 다음에야 생각하거나 따질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심지마다 골목집을 허물고 아파트를 올려세우는 일도, 온나라 곳곳에 끊임없이 새 고속도르를 깔고 고속철길을 닦는 일도, 새로운 공항이나 항구를 짓는 일도, 남과 북이 하나된 다음에 꾀하거나 이룰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꼭 이맘때에 하려 한다면 남녘과 북녘 모두한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을 노릇이며, 더 나아가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지구라고 하는 삶터를 다치지 않게 하는 길을 찾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3) 우리는 우리 둘레를 어떻게 바라보면서 책을 만들까

잡지 〈여원〉 1980년 5월호 '어린이날 특별부록'으로 나온 《장병림 감수-성, 엄마 알고 싶어요》(여원문화사,1980)라는 책을 봅니다. 글쓴이를 밝히지 않는데, 이야기 얼거리로 보아 틀림없이 이웃 일본에서 나온 책을 슬쩍 옮겨내면서 '감수'라는 말만 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예전에 이런 책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도, 이런 책을 '잡지 별책부록'으로 내놓아 주면서, 쉬 옮겨지기 어려웠던 책이 널리 읽힐 수 있었고, 곧잘 나올 수 있던 지난날입니다. 무엇보다도, '잡지 별책부록'으로 책을 끼워서 줄 만큼, 사람들한테는 책이 좋은 선물이었어요. 이제는 잡지 별책부록으로 책을 주는 일은 거의 없는데, 곰곰이 따지자면 별책부록으로 주어도 안 읽는 책이 되었다고 할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잡지 줄거리부터 썩 새겨읽을 만하도록 엮지 않는 오늘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날 잡지는 차곡차곡 모아 놓고 나중에 다시 돌아볼 만하도록 엮었다면, 오늘날 잡지는 굳이 모을 까닭이 없이 그때그때 잠깐 들춰보고 나서, 곧바로 폐휴지로 내다 버려도 될 만큼 유행을 좇으면서 엮는다는 느낌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조용히 찾고 고르고 장만하고 읽고.
 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조용히 찾고 고르고 장만하고 읽고.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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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테르나크의 연인'이라는 작은이름이 붙어 있는 《올가 이빈스카야/신정옥 옮김-라라의 회상 (하)》(과학과인간사,1978)는 상권이 없지만, 하권만으로도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집어듭니다. 언젠가 만남끈이 닿는다면 앞엣권을 손에 쥘 수 있을 테고, 만남끈이 닿지 않는다면 하권 하나만 책꽂이에 덩그러니 꽂아 놓고 있겠지요. 어쩌면, 먼 뒷날 우리 아이가 헌책방마실을 하다가 '아빠가 못 찾은 다른 짝 하나를 내가 찾아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알아보고서는 짝을 맞출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2집, 한국어 자료집》(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업회,1989)을 봅니다. 함경도 천주교회 발자취를 돌아보도록 하는 자료모음인데, 백 해를 훌쩍 건너뛰면서 지난날 모습을 몇 가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1889년도 보고서] 쿠테르 신부에게는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 그리고 강원도의 일부까지 합하여 28개 공소가 맡겨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인 영세자 99명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함경도가 감동하기 시작해서 원산에서 교우들을 괴롭혔던 사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지방에 벌써 상당한 수의 숭배자를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1쪽)
[뮈텔 일기 1892년 3월 21일] 3월 21일. 원산에서 우편물. 르 장드르 신부가 눈다리에서 몹시 심하게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샤르즈뵈프 신부가 그를 간호하러 가다. 3월 7일자, 11일자로 되어 있는 두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병명은 장티푸스인 듯하다. 하느님, 그를 구해 주소서! (186쪽)
[가톨릭청년 제2호, 1933.7.] 덕원 신학교 수학여행. 거월 7∼8일경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생은 교장 신부 인솔 하에 금강산으로, 중등과 학생은 삼방, 고신 등지로 각각 수학여행을 무사히 하고 귀교하였다고. (242쪽)

천주교회 발자취를 헤아리려는 분들한테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리고, 꼭 천주교회 발자취가 아니더라도, 이 땅 이 겨레가 보내온 지난 삶자락 하나를 더듬어 보기도 합니다. 덕원 신학교라는 곳에서 수학여행으로 금강산에 갔다고 하는데, 이무렵 다른 학교에서도 으레 금강산 수학여행을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소설책 《나다니엘 호돈/박경선 옮김-일곱 박공의 집》(세계문학,1995)을 고릅니다. 호돈(호손) 문학책으로 이 작품도 옮겨진 적이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좋아할 텐데, 나중에 우리 아이도 크면 아이도 좋아해 줄는지 궁금합니다.

《W.F.Davidson & R.Thomlinson-the country life picture book of Scotland》(Country Life Books,1977)는 시골살림을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스코틀랜드 시골살림이 차분하게 담긴 사진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다가, 우리네 시골살림을 사진책으로 담아내면 어떤 모습이 될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네 사진쟁이 가운데 우리네 시골살림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담고 있는 분이 있을까요? 몇 번 마실 가듯 도시에서 시골로 떠나며 찍는 사진을 넘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가운데 시골사람 살림살이와 삶터를 꾸밈없이 담아낼 만한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오늘날 세상에서는 시골살림 사진찍기는 '낡은 사진'이라거나 '덧없는 사진'이라거나 '돈 안 될 사진'으로만 여기지는 않는지요?

도시살림을 사진책으로 담아낸다면 어떻게 될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시골살림과 마찬가지로, 도시살림을 꾸밈없이 바라보거나 부대끼면서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는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아파트 살림이든 골목집 살림이든,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든,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 사진 작품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만듦사진'뿐입니다. '꾸밈사진'뿐입니다. '겉치레사진'뿐입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세탁기로 빨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가스렌지로 불을 올려 압력밥솥으로 밥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는 있는지요?  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뒷간에서 똥을 누는 모습을, 걸레를 빨아 마룻바닥 훔치는 모습을, 부채질을 하거나 선풍기를 틀거나 에어컨을 켜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또 이런저런 여느 모습을 꾸준하게 사진으로 담으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과 자취'를 보여주는 사진은 있기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는 우리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진책도 없지만, 우리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는 그림책이나 글책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국어사전이든 영어사전이든 오로지 지식으로만 다루고, 사전을 '즐겨읽'도록 엮는 매무새란 없습니다. 문학책이라고 해서, 교육책이라고 해서, 역사책이라고 해서, 철학책이라고 해서, 과학책이라고 해서, 썩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을 넘어 삶을 다루는 책이 드물고, 지식을 보여주는 책을 넘어 삶을 나누는 책이 드물며, 지식으로 채우는 책을 넘어 삶을 사랑하는 마음결로 보듬으려는 책이 드뭅니다.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문간에 들어서면, 문간에 붙여놓은 여러 글월이 보입니다.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문간에 들어서면, 문간에 붙여놓은 여러 글월이 보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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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집으로

마음에 와닿는 책들을 반갑게 고르고 나서 책값을 셈합니다. 책은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고, 비옷을 챙겨 입습니다. 비옷으로 가방까지 덮습니다. 책방에서 전철역까지 가까운 길을 살살 달립니다. 동인천으로 가는 급행전철에 자전거를 싣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오늘 고른 책 가운데 한 권을 꺼냅니다. 전철 에어컨 바람으로 자전거와 비옷 물기를 식히고, 자전거 옆에 선 채로 책을 읽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먹은 마음밥을 바탕으로 좁아터진 제 마음자리를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만나는 책으로 새 마음이 되도록 다스리고, 새 눈길과 새 몸가짐으로 새 상각을 키워 나가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헌책방, #뿌리서점, #책읽기, #김성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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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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