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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초봄. 언 땅이 조금씩 풀려가던 계절이다.

5공 군사독재의 철벽을 허물어뜨리는 저항이 직선개헌 쟁취투쟁으로 시동을 걸고 있었다.

부산에서 집회가 열렸다.

직선개헌 투쟁을 주도하는 김영삼 김대중 두 '대부' 가운데 김영삼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날 김대중은 당연히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신민당 고문 김영삼이 테이프를 틀었다. 직선 투쟁을 호소하는 김대중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자 운집한 부산 시민들은 열렬한 환호를 터뜨렸다.

87년 5월 강력한 투쟁을 위한 야당이 새로 탄생했다. 얼마나 정권에 위협이 됐는지 용팔이를 동원한 창당 방해공작마저 저질렀다. 창당을 할 건물조차 임대를 못하도록 봉쇄했다. 정통민주 야당 사상 가장 협소한 장소인 흥사단에서 창당기념식을 열었다.

통일민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독재정권의 올림픽은 나치의 올림픽과 다를 바 없다"고 격렬히 규탄했다. 이 발언을 꼬투리 삼은 독재정권의 검찰은 야당총재 김영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87년 6월, 호헌 철폐를 외치는 거리 투쟁에서 김영삼 총재는 낯선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상징과도 같던 백발이 검게 염색돼 있었다. 이발하는 동안 졸았더니 이발사가 염색을 해 놨다는 게 당사자의 설명이었다.

대문 밖을 나서지 못하는 김대중의 몫까지 대신해 김영삼은 거리에 나섰다. 그러고는 지독한 최루가스에 눈물을 쏟으면서 총재는 '닭장차'에 끌려갔다.

두 사람이 갈라섰다.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떠나면서 후보 단일화가 실패했다. 이로 인해 민주 정권 탄생도 실패했다. 87년 12월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나 김영삼마저 통일민주당을 버렸다. 초선의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이 해산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노무현의 저항을 외면하고 노태우가 기다리는 그 길로 향했다.

많은 김영삼의 지지자들이 이탈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갈 테면 가라'는 투로 여태껏 자신이 걸어 온 모든 것과 정반대의 길을 20년째 걸어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김영삼은 김대중과의 화해를 위한 문병에 나섰다.

함께 민주야당 투쟁을 하면서도 주제를 독점하는 것은 항상 김대중이었다는 불편한 심정이 김영삼의 지난 20년을 저리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났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만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파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지나간 일일 뿐이다.

두 김 씨라고 한다면 이제 김영삼 뿐이다. 김대중의 몫까지 자신이 떠맡았음을 부정하지 말아야 김영삼의 화해에 진정성이 실린다.

그렇다면 시급히 김영삼은 돌아와야 한다.

김대중이 미워서 자신이 버렸던 그 자리,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으로 돌아와야 한다.

강성 투쟁가 김대중만 연금 시키면 김영삼 혼자 아무 것도 못하리라 여겼던 독재자들에게 느닷없이 검은 머리를 하고 나타났던 그 시절의 김영삼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와 함께 번지수 없이 20년을 떠돌고 있는 민심이 있다. 그것을 제 자리로 돌려야 한다. 이제 김영삼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전 데일리서프라이즈 경제부장)




태그:#김영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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