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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새벽에  감사 전화를 하다

내가 박준성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방송대 송찬섭 교수님을 통해서다. 하남에서 목공예전이
열리고 있는데 한 번 가보라고 해서 단순한 목공예가로 알고 전시장에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은 무거운 슬라이드 필름을 등산 가방에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며 노동자의 역사, 민중의 역사를 강의하는 유명한 강사였다.

특강이 끝나고 내가 좋아하는 두 분의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명희 선생은 오랜 세월 박 선생의 행보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친구 같은 동반자이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 박준성 선생과 부인 김명희 선생 특강이 끝나고 내가 좋아하는 두 분의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명희 선생은 오랜 세월 박 선생의 행보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친구 같은 동반자이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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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선배를 찾아가 할 일을 물었을 때 선배들이 한 충고는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해. 분통이 터지겠지만 꾹 참고 공부해. 나중에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이 많을 거야"였다. 선생에게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젊은 넋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 김태훈의 죽음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눈 팔지 말고 더욱 긴장하라는 아픈 채찍이 되었고 선생은 그 채찍의 의미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선생은 이후 안락한 삶을 버리고 20년이 넘도록 무거운 슬라이드를 지고 전국을 누비며 노동자들에게 민중사 교육을 하고, '역사와 산', '목공예 캠프' 등을 통해 역사의 주체인 노동자와 민중과 호흡하며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선생의 진면목을 엿본 것은 월간 <작은책>이 마련한 '작은책 12주년 겸 노동자 대 투쟁기념 특강'을 통해서였다. 그때 선생은 청중들에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떻게 행동했겠는가?"를 물으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시켜 주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광목 한 필을 가지고 을밀대에 올라 죽음을 각오하고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에 항거했던 강주룡 평원고무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라며 몸을 던진 노동자의 이야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강의를 묶은 책이  바로 국방부에서 불온 도서로 선정한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이다.

사실 그 당시 나는 강연은 너무 듣고 싶었지만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무조건 강의가 진행되는 장소를 찾아갔다. 인터넷을 통해 얼굴을 익혀 둔 월간 <작은책> 안건모 발행인이 '철수와 영희' 출판사 대표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무조건 앞으로 나가서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안녕하세요. 저 강의를 들으려고 왔는데요..."라고  말을 건넸다. 안건모 발행인은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웃으며 "아, 네 잘 오셨어요. 강의는 잠시 후에 시작됩니다"라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런데요, 제가 돈이 없거든요. 강의료는 강의를 잘 듣고 기사로 정리해서 올리는 것으로 할게요"라고 내멋대로 정해 버렸다. 안건모 발행인은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웃더니 "어쨌거나 저녁이나 먹읍시다"라며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시켰다.

그렇게 듣게 된  홍세화, 안건모, 박준성, 정태인, 하종강, 이임화 6명의 쟁쟁한 강사들의  강의는 마약처럼 내 삶을 속이던 허상에, 대책없이 미래를 저당 잡힌 채 현실을 좀먹는 나를 무지에서 일깨웠다. 나는  강의를 들으며 새롭게 눈을 뜰 때마다 울어야 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처럼 소중한 강의가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얼마나 전율이 일었는지 예의도 모르는 사람처럼 첫 새벽 박준성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하늘 아래 그렇게 소중한 분들이 있어,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누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랴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 이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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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선생이 이번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책의 핵심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민중과 노동자의 삶의 기록이 바로 역사며. 역사가 희망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힘주어 말한다.

"역사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를 잊고 현재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망각'과  '무관심'이 낡고 썩은 세력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책의 핵심은 크게 3부로 엮여져 있다. 1부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역사 보기는 역사를 보는 시야를 확 트이게 하는 내용들로 꽉 차 있다. 슬라이드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200장면에서 단 몇 장면에 담긴 진실을 읽어 낼 수 있어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그야말로 가슴을 치며 "지금 이 순간 알게 된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뼈아픈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부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는 피로 쓴 '노동 해방' 사라진 깃발, 메이데이의 유래, 다시 찾아야 할 이름 노동절부터 87년 7·8·9 투쟁까지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꼼꼼하게 짚어준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읽고 나면 "내가 왜 노동자야? 난 직장인인데"라고 말했다던 지인의 딸도, 전철역에서 새벽 무가지 신문을 돌리던 내게 "나 같으면 이런 일은 절대 안해!"라고 말하던 아들아이도 자신의 정체성은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만 말할 것이 아니라,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과거를 장악하는 자(세력)가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고, 역사에 발맞추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없어야 할 것은 없애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파괴와 창조, 노동과 투쟁을 통하여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 차별하는 세상을 끝장내고,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이 사회에서도 쓸모 있고, 먹고 살 걱정 없이 올바로 잘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러한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향한 꿈과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
- 책 내용 중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게으름'과 '나태함'을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로 정당화하며 살던 나와 같은 이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매서운 회초리가 아닐 수 없다.

3부 되새겨 보는 역사 인물에서 늘 나의 가슴에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이는 최초의 고공여성노동자인 강주룡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을밀대에 올라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여성, 그이의 삶은 아직도 여성의 몸으로 고공 투쟁을 벌이고, 단식을 하고, 삼보 일배를 하면서 노동자로서 여성의 일과 삶을 지켜내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을 있게 하고 없을 것을 없게 하기 위한 파괴와 창조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강주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까닭은 을밀대 고공 농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31년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잠시 무장 독립 단체에도 참여했으며,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노동조합 파업 투쟁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의 활동가로 성장하였다. 강주룡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당당한 여성이자 노동자로 깨어났으며,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선 당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 책 내용 중

강주룡의 이야기는 자신의 삶을 거짓 희망에 저당 잡힌 내 삶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누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이 아닌, 삶의 노예로 자신의 귀중한 삶을 허비하고 있다.

삶의 기록이나 역사는 1%의 것이 아니다. 자본가의 것도 아니다. 주류의 시각으로 왜곡되어 온 기록은 참된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기록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내 삶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사실 하나만 자각하고 있어도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는 바로 그런 진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박준성 지음, 이후(2009)


태그:#노동자 역사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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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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