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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일하는 시장
▲ 아들이 뛰노는 곳은 엄마가 일하는 시장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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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든 반드시 한 번쯤은 슬럼프가 찾아온다. 과정에서 흥미를 잃었거나 결과에서 차질을 빚었을 때,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계속 진행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여행의 매력은 낯선 문화체험과 다양한 만남 속에 자아를 찾아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말의 기대도 소박한 기쁨도 사라져 버릴 때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무의미의 궁극을 향해 달리는 찰나의 연속들. 그렇다. 나,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나 보다.

보이지 않는 치열함과 고단함이 묻어나는 시장.
▲ 느긋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치열함과 고단함이 묻어나는 시장.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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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시장. 가장 인간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그 속으로 달려갔는데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주변인이 되어버린다. 말을 걸고, 길거리 군것질을 하고, 시선을 맞추던 일들이 더없이 덧없게 느껴진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아이가 먼저 웃는데 심각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나다. 예쁜 빛깔의 과일과 가내수공업으로 빚은 과자를 추천하는 아주머니의 손에 고개조차 돌아가지 않는다. 이러니 벼락같은 행운마저 뒷걸음 칠 기세.

마음의 안녕을 위한 자들의 선택.
 마음의 안녕을 위한 자들의 선택.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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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플라자에 세워진 빠알간 교회 지붕의 첨탑을 봐도 도무지 경건함을 느낄 수 없다. 더위를 식혀주는 나무 아래 있으면서도 그 나무 때문에 온전한 교회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며 쓴 기침을 내뱉는다. 길 가에 핀 새큼한 나무열매를 보고서 한 알 따먹는 낭만보다 제자리높이뛰기 해야 할 수고스러움이 끔찍해 무겁게 도리질 한다. 어차피 누군가 그것들을 따다 팔 거라는 생각에 흡족해 하면서. 편리한 타협에 낭만은 사치다.

시큼새큼한 열매. 길 가 나무에서 따 먹을 수 있다.
 시큼새큼한 열매. 길 가 나무에서 따 먹을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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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한 번 올려다봤다간 현기증이라도 나겠다 싶다. 하지만 더 구역질나는 그림이 음흉하게 내 정신을 갉아먹는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내가 뭐가 그리 위협적이라고 다들 오두방정들인가. 닭똥집만도 못한 육질이라면 그대들이 스스로 깃털 뽑고 끓는 물 앞에 서 있어도 비둘기보다 한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내가 지나가자 무리 지어 있던 맹금류들이 흩어져 언덕 위로 올라간다. 무심했어야 할 그 때 난 가장 뜨거운 시선으로 남겨진 흔적의 처참함을 보고 말았다. 죽은 개의 내장을 교묘하게 파헤쳐 놓은 피비린내 나는 현장. 쥐라도 사냥해서 먹으면 말을 안 한다. 청소부는 무슨 얼어 죽을. 이런 얍삽한 기회주의 같으니. 우리 이제 더 이상 이런 일로 마주치지 말자. 너희들에게서 언뜻 나의 모습이 비쳐지는 게 불쾌하다. 내가 기회주의의 레전드니까.

내가 지나가자 일제히 언덕 위로 올라갔다.
▲ 죽은 개를 뜯던 맹금류들. 내가 지나가자 일제히 언덕 위로 올라갔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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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는 것과 세월아 네월아 여유의 가면을 쓴 거드름의 자태는 비교불가라고 생각했던 지난 날. 하지만 그것이 뼈아픈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누가 작렬하는 태양의 입김을 흠뻑 빨아들여 시키지도 않은 아스팔트 위를 달린단 말인가. 숙성이 성숙을 만든다. 보라, 자연에 감히 맞서지 않고 현명하게 기댈 줄 아는 트럭 아래의 사내들을. 하마터면 난 그들에게서 신선 내음을 맡을 뻔했다.

지리멸렬한 국경통과 때문에 트럭 아래 그물침대를 쳐 놓고 자는 운전사들.
▲ 시에스타 지리멸렬한 국경통과 때문에 트럭 아래 그물침대를 쳐 놓고 자는 운전사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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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이 가장 사기꾼 인상을 풍기는 환전상이 내게로 달려든다. 그는 이 얼뜬 청년이 곧 국경을 나가게 되었으니 일단 낚아보자는 강태공의 심정으로 다소 과도한 환율을 적용시킨다. 달러도 아니고, 유로도 아닌 '듣보잡' 나라들의 환전이라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오 마이 프렌드! 너의 어려움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 건가, 지금 이대로 국경을 넘어가면 더 높은 환율이 적용되지 않겠는가'하며 환전상은 친절과 협박의 선을 긴장도 없이 넘나든다.

더위를 우습게 여긴 죄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동공이 풀린 나는 결국 넉다운이 된다. 반쯤 정신줄을 놓은 난 터덜터덜 국경검문소 사무실에 들어간다. 국경 관리자는 내 만신창이 모습을 보더니 당황했는지 연신 시원한 물을 가져다준다. 정수기까지 예닐곱 걸음이면 갈 거리라도 지금 내 몸은 나사 빠진 자리에 뻘건 녹으로 굳어진 폐기물 신세.

한 푼이라도 더 이득 보려는 환전상.
 한 푼이라도 더 이득 보려는 환전상.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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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배려로 간신히 목 좀 축인 뒤, 난 그에게 부인에게 사랑 받으라며 인삼차 한 팩을 선물로 주었다. 그가 함지박만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아내는 없고, 여자 친구는 있다고. 그럼 더 뜨거운 사랑을 받겠군. 중년 포스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라. 분명히 30대 중반 아저씨인데 나보다 두 살 어리다는 말에 에어컨 앞에서도 답답함이 밀려온다. 중간에 틈새 난 그의 흰 이가 유난히 눈부시게 내 눈에 들어온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엘살바도르를 벗어나는 때에도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다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 어느 순간 내 몸이 온두라스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 희미하게 눈치 챘을 뿐. 이 모든 게 그저 날씨가 더워 급상승한 불쾌지수라며 자위해 보지만 나는 느끼고 있다. 이건 슬럼프고, 잘못하다간 오래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긴장해야 할 국경에서조차 될 대로 되라는 무심의 희열에 오른 동시에 병든 닭 마냥 생기를 잃어버린 나를 보며 확신했다.

입국 며칠만에 금방 도착한 엘살바도르-온두라스 국경.
 입국 며칠만에 금방 도착한 엘살바도르-온두라스 국경.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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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세계일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자전거여행, #국경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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