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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여기 토마토 좀 썰어주세요."

저녁 준비로 분주한 모니카, 딕, 그리고 나타나엘.
 저녁 준비로 분주한 모니카, 딕, 그리고 나타나엘.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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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코하우징 툴스투간(Tullstugan)의 오후 4시. 부엌 팀을 맡게 된 딕(Dick), 모니카(Monica), 나타나엘(Natanael)은 이미 저녁 준비로 분주하다. 오늘의 메뉴는 아르헨티나 수프. 이미 지난주에 회의를 거쳐 정해진 요리다. 40인분의 요리를 만들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후 6시,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들도, 나이 많은 할머니도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다. 줄을 선 사람들도,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식당은 금세 사람들의 목소리로 활기가 넘친다.

줄을 서서 음식을 받고 있는 툴스투간의 주민들.
 줄을 서서 음식을 받고 있는 툴스투간의 주민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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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함께 저녁을 먹는 이들은 한 식구가 아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들은 남남인 이웃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겠지만, 툴스투간의 주민들은 15년째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협동 주택 '코하우징'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툴스투간(Tullstugan) 코하우징.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툴스투간(Tullstugan) 코하우징.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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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스투간은 스웨덴에 있는 한 코하우징의 이름이다. '코하우징(co-housing)'이란 여러 세대가 공동 시설을 마련해 함께 모여 사는 협동 주택으로, 1970년대 초반 덴마크에서 시작해 조금씩 형태의 변형을 거치며 스웨덴, 미국, 일본 등으로 퍼져나갔다. 현재 스웨덴의 경우에는 아파트에 공동생활 공간을 마련한 고층 코하우징이 일반적이다.

코하우징은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의 수가 증가하면서, 여성만이 가사 일을 담당하는 것을 막고 남녀 모두가 공평하게 가사 일을 분담하는 '남녀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여 발달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는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나타나엘.
 음식을 준비하는 나타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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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툴스투간에서는 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주 4번, 주민들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다. 부엌 팀은 한 주에 3명씩, 그리고 한 사람이 4번 중 2번을 담당한다. 물론 부엌일을 맡는 것은 코하우징 거주자들의 의무다.

코하우징에 살면 부엌 팀을 자주 맡게 되어 번거로울 것 같지만, 툴스투간에서는 5주에 2번만 부엌일을 하면 된다. 스웨덴 코하우징 협회장이자 툴스투간 거주자인 딕은 "2번만 일 하면 5주간 저녁 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부엌일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딕은 "거주자들이 기본적으로 부엌 팀을 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고, 부엌 팀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저녁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부엌 팀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코하우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한다"고 했다.

실제로 토베(Tove)는 5~6년 동안 코하우징 옆 건물에 살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저녁을 매번 만들지 않아도 돼서 편하고, 이웃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저녁 시간마다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려되는 것은 사생활 보호다. 부엌과 공동 시설을 함께 사용하다 보면, 사생활이 쉽게 침해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딕은 "저녁을 먹는 부엌과 공동 시설 외에는 모두 개인 공간이고, 우리는 남의 아파트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지켜진다"고 말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 갈등은 대화로 해결

저녁 식사 중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
 저녁 식사 중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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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한 식탁에 모였다. 다음 주 저녁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 토의하는 부엌 팀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나타나엘이 와인을 가져왔다. "술을 마시면 더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그러고 나서는 모두의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르며 건배를 했다. 지난 주에 결혼한 그를 축하하는 건배였다. 그렇게 웃고 즐기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다음 주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코하우징에서는 저녁 모임이 전부가 아니다. 이 외에도 코하우징에 따라 다양한 친목 모임이 열리곤 한다. 툴스투간에서도 저녁 식사 외에 부정기적으로 주민들이 강연을 열고 있다.

툴스투간 주민인 라세(Lasse)는 툴스투간의 문화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지난 주에는 딕이 아프리카를 다녀온 뒤 주민들에게 아프리카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다음에는 수학을 전공하는 자신이 수학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주민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재능을 서로 나누고 이웃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기에 이웃 간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다행히도 툴스투간의 경우에는 큰 다툼 없이 모두가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다. 몇 달 전 주택 소유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곧 문제가 해결돼서 갈등은 쉽게 해결됐단다.

15년째 툴스투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니카는 "갈등이 많을수록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할 뿐"이라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딕은 코하우징이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모두가 지켜야 할 몇 가지 명확한 규칙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코하우징, 이상적인 주거문화로 발돋움

툴스투간에 거주 중인 스웨덴 코하우징 협회장 딕 얼반 베스트브로(Dick Urban Vestbro)씨.
 툴스투간에 거주 중인 스웨덴 코하우징 협회장 딕 얼반 베스트브로(Dick Urban Vestbro)씨.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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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하우징 사람들은 이웃끼리 상부상조하며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아이가 있는 부부 간에는 서로의 아이를 돌봐주면서 더 많은 개인 시간을 보장받고, 서로 감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절도 등의 범죄도 드문 편이다.

하지만 역사가 짧아, 코하우징이 두 번째로 발달한 스웨덴에도 그 수는 적은 편이다. 스웨덴의 코하우징은 45채 정도인데, 전체 주택의 0.05%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코하우징의 이념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면서 코하우징의 수도 조금씩 늘고 있다.

현재 코하우징은 급속한 도시 성장을 겪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기주의와 소외감이 팽배하는 도시 속에서 선진국 중에서도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는 북유럽의 코하우징은, 어쩌면 미래에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이상적인 주거 문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코하우징 방문을 허락해주신 베스트브로씨와 주민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스웨덴, #코하우징, #툴스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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