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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언어부터 제2외국어까지 모든 영역의 시험이 끝나고 후배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겠지요. 아, 오늘 시험 치는 수험생 중 최고령은 77세가 된 할머니시라고도 하니까 후배라는 호칭이 적절치 않을까요. 어찌됐든 개인적으로 '선배' 혹은 '후배'라는 단어에 친근감을 느껴서 좋아하기 때문에 그냥 쓰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07년 11월에 여러분보다 조금 먼저 수능을 한 번 본, 다른 건 몰라도 수능만큼은 콩알만큼이라도 앞서 경험한 선배임이 분명하니까요. 다들 그랬겠지만, 참 치열하게 겪었더랬지요. 아무튼 고루할지는 모르겠지만 후배님들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선 수고하셨습니다.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과 따윈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최선을 다한 겁니다.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무언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컨디션 악재, 따르지 않는 운수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순간에서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한겁니다.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던 최후의 100일을 어수선히 흘려보낸 게 아쉬워도, 다 풀지도 못한 채 쌓아둔 문제집들이 눈에 밟혀도, 그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후배님들의 한계를 과소평가하자는 게 아니지만, 제가 그랬고 제 친구들이 그랬기에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위염이며 급체에 시달려서 막판까지 한의원을 전전하며 컨디션을 붙잡지 못했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번호를 밀려썼다거나, 마킹을 실수했다 해도 그 모든 게 이미 붙잡을 수 없이 지나가버린 과거인 겁니다.

시험은 잘 보셨나요

시험은 잘 보셨나요.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일 겁니다. 형식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참 곤란하다는 거, 저도 겪어봐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묻겠습니다. 시험은 잘 보셨나요? 제가 감히 대답하지요. 여러분은 분명 시험을 못 봤을 겁니다. 그토록 기도하고 빌고 꿈꿔 왔던 '수능대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정답을 맞춰보지만, 아마 기대와는 좀 다를 겁니다. 사실 그건 모의고사와 별 차이가 없는 성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슴 가득 대박을 꿈꾸던 마음으로는 쪽박이 아닌 중박이라고 해도 실망감만 들겠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기대만큼, 바란 만큼 시험을 못 봤을 겁니다. 그래서 쓴 소주도 생전 처음 마셔보고, 밤새도록 라디오를 들으며 머리가 띵할 만큼 펑펑 울어대기도 할 겁니다. 2년 전 저처럼 말입니다.

참 허무하지요

허무할 겁니다. 3년 동안, 혹은 12년 동안 오로지 바라보고 달려온 그 지점을 지나쳐 버렸으니까요. 이제 무얼 위해 살아야 할까, 혹은 다시 한 번 도전해보면 어떨까 고민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수능 본다고 생일 때만큼이나 많은 선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시험 시간에는 비행기도 못 날게 하고 직장인 출근 시간도 미룬다고 하니까 정말 온 세상이 수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수능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이란 신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두렵게도 느껴졌습니다. 수백, 수천의 잠못들던 밤들이 단 열 시간 이내에 결딴난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지요.

지옥같은 5분

수능시험이란 엄청나게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긴 한데 그 와중에도 해프닝은 일어납니다. 매 시간 시험이 끝나면, 고사본부에서 십수 명의 수험생을 방송으로 호명하지요. 이 경우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주로 신상에 관한 마킹이나 기입을 잘못한 경우지요. 담임 선생님이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터라, 실수 없이 마킹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사회탐구가 끝난 후 제 이름이 호명됐습니다. 평소에 마킹 실수를 하는 편이 아닌지라 설마, 별 문제 있겠어 생각하면서도 새가슴이 되어 고사본부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이런, 한 학생이 눈물을 쏟으며 처진 어깨로 걸어나옵니다. 나도 눈물이 핑 돕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머릿속에선 '재수' 두 글자가 맴돕니다. 외국어영역 답안지를 확인했는데, 휴, 이름을 안 썼답니다. 다행히 마킹은 제대로 했습니다. 심장박동을 진정시키며 고사실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영웅담인 양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 제게는 지옥과도 같은 5분이었답니다.

다 그저 지나간 이야기가 됩니다

'...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 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끓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피천득의 수필 <이야기>입니다. 외국어영역 점수가 백지화될 뻔한 해프닝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18시간을 공부했던, 지독하던 수험생활도 지금은 그저 이야기입니다. 지겨웠던 수학과 일 년에 열두 번은 더 보던 모의고사도 다 그저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밤새 울고 간혹 술도 마시고, 내일 아침 눈이 탱탱 부어서 서로를 마주할 후배님들의 오늘 하루도, 2년이 지나고 나면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험생이 있더군요. 시험도 보기 전 신새벽에 말이지요. 지나고 보면 다 한때 이야기인데 그는 굳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하지만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기에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교만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부디 더 이상의 안타까운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괴로움들도 다 그저 지나간 이야기가 될 겁니다. 후배님들 수고 많으셨고, 푹 쉬십시오.


태그:#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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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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