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2년 늦가을 어느 날, 노란 은행잎이 이리저리 뒹구는 서울 봉천동 거리에 촌티 나는 이십대 남자가 서 있었다. 더플 백처럼 생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흰색 강아지를 안고 있다. 표정이 재미있다. 억울하고 난감한 속내가 얼굴에 가득하다. 

17년 전 이맘때쯤 내 모습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말티즈)를 안고 거리로 나선 순간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착한 척, 친절한 척… 온갖 부드러운 표정을 다 지으면서 사정을 했지만 버스기사 아저씨들은 요지부동, 아무도 차에 태워 주지 않았다. 아침부터 개를 태우면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택시도 마찬가지. 설듯 말듯 하다가 내 품 안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도망치기 바빴다.  

승차 거부로 '확' 신고해 버릴까! 속이라도 시원하게 개가 왜 재수 없는 동물이냐며 따져 보기라도 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만한 용기도, 시간도 없었다. 그날은 충남 예산까지 가서 운전면허 시험을 치러야 하는 아주 바쁜 날이었다. 

큰 누나 단식투쟁 때문에 하게 된 '징벌적' 심부름

늦가을 낙엽길
 늦가을 낙엽길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는 녀석이 어째서 개를 안고 나왔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난 개를 좋아한다. 한때 애견가 소리도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운전면허시험 보는 날 서울에서 100Km도 더 떨어져 있는 예산까지 개를 안고 갈 정도는 아니다. 그날 개를 안고 낙엽이 떨어지는 스산한 봉천동 거리를 헤매게 된 것은 순전히 큰 누나 때문이다.

"아무래도 처남이 해결해야겠어."
"저 낼 운전면허시험 보러 가는데요."
"예산에서 시험보고 대전까지 좀 데려다 줘, 얘 대전 친척집에서 얻어왔어. 다시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아."
"네엣! 예산에서 대전… 굉장히 먼 데요."
"그래도 어쩌겠어 처남 누나가 저 모양인데… 그래도 같은 충남이잖아."

답답해서 펄쩍 뛸 노릇이었다. 운전면허시험 보러 가는 사람한테 강아지를 데려다 주라니. 그것도 예산을 거쳐서 멀고 먼 대전까지. 예산과 대전은 행정구역만 같은 충남일 뿐 사실은 서울에서 대전 가는 것보다도 더 먼 거리다. 

누나는 강아지 때문에 거의 식음을 전폐한 상태였다. 매형이 누나 몰래 강아지를 얻어온 탓이다. 누나는 강아지가 가까이 오면 몸에 소름이 돋는 체질이었다. 누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틀째 식음을 전폐한 채 매형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징벌적 심부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핏줄인 누나가 저토록 고집을 피우니 동생이 해결하라는. 고민에 고민을 (약 5분간) 거듭한 끝에 승낙을 하고 말았다. 말이 승낙이지 사실은 명령을 수행하는 처지였다.

당시 난 군대를 제대하고 취직이 되지 않아 고향집에서 밥만 축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에게 사정해서 가까스로 취직을 하고 서울 누님 댁(봉천동) 에 빌붙으러 올라온 터였다. 그러다 보니 누나, 매형 부탁은 곧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모아 셋방이라도 얻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누나 집에 얹혀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애견가 택시기사... 동창생 만난 것처럼 반가워

말티즈
 말티즈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택시 기다리세요?"
"네, 태워 주실 수 있나요?"

오호!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오래 전에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초등학교 동창생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 택시기사는 굉장한 애견가였다. 강아지를 안고 쩔쩔매는 모습을 길 건너편에서 보고는 무단 유턴해서 내게 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었다. 택시기사는 강아지를 가방에 숨기고 시외버스를 타라고 내게 충고해 주었다.

조마조마 두근두근, 택시 기사 충고대로 가방에 강아지를 숨기고 버스에 올랐지만 가슴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난 체질적으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만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그런 내가 강아지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시외버스에 올랐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개 데리고 버스 타신 분 있어요?"

올 것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건만 녀석이 갑갑했는지 가방 틈을 비집고 나와 "컹" 하고 짖고 말았다. 강아지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네~에 아주 조그만 강아지라서~~ 그냥."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난 절대 이 강아지가 사람을 문다거나 하는 피해를 주지않는다는 속뜻이 담긴 대답을 얼떨결에 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그때 분위기와 어울리지않는 이상한 대답이다.

"오줌이나 똥을 싸면 안 되니까 잘 간수하세요. 다음부터는 타기 전에 꼭 말씀하시구요."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싶었다. 길 옆에 차를 세우고 당장 내리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하던 터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예산까지 갈 수 있었다.

운전면허 시험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예산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은 강아지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평소에 자주 싣고 다녀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분들은 강아지, 닭 심지어 작은 염소도 버스에 태운다. 

"오늘 보신탕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운전면허시험 자동차
 운전면허시험 자동차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난관은 면허 시험장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아지를 안고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재수 없이 왜 개를 시험장에 데리고 왔느냐는 눈빛이었다. "시험 떨어지면 이 개 탓이야" 하고 말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은 코스와 주행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이름을 부르면 달려 나가서 자동차에 올라타야 했다. 드디어 내 차례, 친절해 보이는 중년 여성에게 일단 강아지를 맡겼다. 근데 이 녀석이 내 품을 떠나자마자 발광을 하며 짖어대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를 버리려는 줄 알았나 보다.

달랠 시간이 없었다. 친절한 중년 여성은 신경 쓰지 말고 시험이나 잘 보라며 등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자동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긴장감 때문에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리는 온통 강아지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대기실에서 뛰쳐나오는 것은 아닌지! 혹시 친절한 중년 여성을 꽉 깨무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시험에 떨어진 누군가 강아지에게 해코지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생각 저 생각 하던 중 '삑' 소리가 났다. 악명 높은 T자 코스에서 그만 금을 밟아 버렸다. 탈락이다. 예전에는 금을 한 번만 밟아도 가차 없이 탈락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정신이 온통 강아지에게 쏠려 있는데 시험을 잘 칠 수가 있겠는가!

얼른 차에서 내려 대기실에 가보니 난장판이었다. 강아지는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강아지를 맡아 줬던 중년 여성은 강아지를 붙잡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강아지는 나를 보자마자 꼬리를 치며 내 품으로 뛰어 들었다. 

주변 사람들 눈이 부담스러워 친절한 중년 여성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리나케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 뒤통수가 따끔 따끔 거렸다. 등 뒤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개를 시험장에 데려오니 당연히 떨어지지."
"오늘 보신탕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강아지 돌려 줄 때는 서운함과 후련함이

그날은 운전면허시험 외에 또 다른 많은 시험을 치른 날이다. 신은 내게 '인내력'과 '자비심'을 시험했다. 그날 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신이 낸 시험에는 합격했다고 생각한다.

강아지 때문에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난 단 한 순간도 강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또 홧김에 쥐어박지도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밥맛이 없어서 점심도 굶고 시험을 쳤지만 강아지는 굶기지 않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 가르침 덕분이다.

대전역에서 강아지를 주인에게 돌려 줄 때 기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운함과 후련함이 교차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 녀석도 내 얼굴을 핥으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룻새 벌써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밤 열 시가 넘어서 서울 봉천동 누나 집에 도착했다. 하루가 십 년 같은 기분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강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면허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세월이 십 년 정도 흐른 어느 날, 누나 집에 강아지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십 년 전에 단식투쟁까지 하며 내쫓았던 강아지와 같은 종류, 바로 '말티즈'였다.

눈이 동그래져서 "누나 개 싫어하잖아, 기억 안 나? 단식투쟁까지 했던 거? 면허 시험 보러 가는 내게 강아지 떠맡겼잖아?" 하고 물으니 누나는 천연덕스럽게 "그랬나! 듣고 보니 그랬던 적이 있는 것도 같고… 키우다 보니 예쁘더라 말도 잘 듣고"라고 대답했다.

누나 말을 듣고 몸속에서 배신감이 꿈틀꿈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마음속으로 '신이시여 나를 또 다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배신감을 다스렸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글



태그:#운전면허시험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