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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지역주민조직 NGO '씨오엠(COM, Community Organizers Multiversity, 지역사회조직운동가 훈련기관으로 실제 조직사업을 병행하는 조직)'의 젊은 조직가 크리거는 다마얀(Damayan) 지역 사람들이 "제방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 지역에서 흘러들어오는 오폐수 탓에 오염된 라구나 호수(Laguna Lake, 필리핀 최대의 호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방이라니요? 많은 사람이 어민이자 호수 근처에 농부로 살아가던 다마얀에서 인위적으로 제방을 쌓는다는 게 호수 생태계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텐데,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표면 면적이 949㎢에 이르는 라구나 호수는 시화호와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호수와 바다가 통하는 길을 막은 것이 주변 생태계 파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1). 이런 경험이 있었던지라, 주민들이 처음부터 제방을 쌓는 것을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 상습 침수구역에 살아가며 주민조직 일을 해온 루벤씨는 답답하다는 듯이 이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제방을 쌓는다고 했을 때, 주민들은 NGO '씨오엠', 그리고 다른 지역 주민들과 제방 건설 반대 모임을 결성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방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겐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아주길 바랍니다."

환경오염의 우려를 알면서도 해야 된다는 루벤씨의 말,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수문을 열지 못하죠. 물이 역류해버릴 테니까요"

다마얀 지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유난히 콘크리트 구조물이 많다.

메트로 마닐라에서 유입되는 물을 강제로 고정시켜 놓은 콘크리트 구조물. 수많은 수중 생물 아래 물은 지금도 끊임없이 호수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에서 유입되는 물을 강제로 고정시켜 놓은 콘크리트 구조물. 수많은 수중 생물 아래 물은 지금도 끊임없이 호수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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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로부터 들어오는 물길을 인위적으로 뚫어서 고정시켜놓은 수로, 그 수로를 통제하는 펌프장(Pumping station), 그리고 옆으로 보이는 조정지(調整地, regulatory Pond)까지 필리핀 정부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진행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라구나 호수 제방 프로젝트(Laguna Lake Road dike Project, 이하 프로젝트)로 건설된 대표적인 시설물들이다. 다마얀 홍수피해 주민조직(Damanyan Floodway Homeowners Association) 대표인 벨리아씨는 이 시설물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 한 달 후까지, 라구나 호수는 만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펌프장의 문을 열어서 메트로 마닐라의 물을 호수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 한 달 후까지, 라구나 호수는 만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펌프장의 문을 열어서 메트로 마닐라의 물을 호수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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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으로 뚫은 수로는 퇴적물을 바로 (호수로) 유입시키고, 비가 많이 오거나 태풍이 오면 수로를 통제하는 펌프장은 메트로 마닐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물을 바로 호수로 보내버립니다. 지금은 수문을 열지 못하죠. 물이 역류해 버릴 테니까. 이런 장치들이 없었다면 '홍수피해 주민조직'도 없을 테고, (태풍이 지나간 지 두 달) 아직까지 잠겨있는 집도 없을 테죠."

그녀의 말인 즉슨, 메트로 마닐라의 홍수 조절을 위해 라구나 호수 근처의 주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며 필리핀 기상 관측 상 최악의 태풍들이 지나간 올해 10월, 라구나 호수 근처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80% 이상이 가옥 침수를 당하고, 그 중 절반은 가옥이 여전히 잠겨있는 상태이다.

결국 이런 흐름 속에서 호우철이면 침수지역으로 변해버리는 자신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은 현실적인 요구를 하자고 움직임을 바꾸게 된다. 그 후, 2004년 2월 18일, 마닐라 시에선 '협정문'이 탄생하게 된다. 건설교통부(DPWH), 라구나 호수 개발 공사(LLDA), 환경자원부(DENR), 주택공사(NHA), 빈민구제 위원회(NAPC), 파식 및 따이따이 시장, 그리고 주민조직 대표들 등이 참여한 이 협정은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라구나 호수 제방 프로젝트를 진행하되, 주민들의 터전이 침수되지 않으면서 환경친화적 제방 건설(필리핀 국립대학 수질연구소와 주민조직들간 연구 진행)을 주민들 거주지역 인근에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협정에 참가한 정부 관계자 및 주민대표들의 서명.
 당시 협정에 참가한 정부 관계자 및 주민대표들의 서명.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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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해도 공사를 계속 강행하니,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 역시 우리 터전을 보존할 방법을 강구하게 됐지요. 하지만 이 결정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습니다."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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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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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조직(Nagdamayan, 낙다마얀) 대표인 루디씨는 그렇게 제방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제방을 쌓으라 한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어종이 줄면서 양식장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전기충격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기까지 했던 어부들은 이러한 결정이 그리 달가울리 없었다. 이 후, 어부의 수는 급격이 줄기 시작했고, 4500여 가구 다마얀 지역에선 이젠 100여 명 만이 어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제방과 타협했던 것이다.

짓다 만 제방, 결국 세 살 아이 목숨을 앗아가

이후 제방 공사는 시작됐다. 콘크리트로 제방을 직접 짓는 것이 아닌 돌망과 흙 등 비교적 환경친화적을 공사는 진행된다. 라구나 호수의 수위가 높아질 때면 외부수로를 이용해 조정지로 물을 빼며, 주민들은 그래도 더이상 침수가 되지 않을 거란 희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희망도 잠시, 9.5㎞ 걸쳐서 쌓아져야 할 제방의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공사비가 없다는 이유 탓이었다. 가쿨라 따이따이(다마얀 지역 관할 시) 시장은 제방 공사의 중지는 전적으로 중앙 정부 책임이라 이야기한다.

"중앙정부는 일본국제협력은행으로부터 '9411만 옌(우리 돈으로 약 128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도 돈이 없다며 공사를 중지했습니다. 지방 정부는 제방 공사를 할 만한 돈이 없다는 점은 당신도 잘 알겠지요?"

제방이 건설되지 못한 지역, 물이 차다못해 수중 생물이 집 안까지 몰려들어오고 있는 형국이다.
 제방이 건설되지 못한 지역, 물이 차다못해 수중 생물이 집 안까지 몰려들어오고 있는 형국이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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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 10월, 최악의 태풍들이 라구나 호수 근처를 덮쳤을 때, 사람들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난다. 메트로 마닐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물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제방이 지어진 지역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으나, 제방 공사가 중단된 지역은 3m가 넘는 높이(제방의 높이는 4.75m로 계획되었다)로 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전에 조정지 및 외부수로가 수위조절을 할 것이란 정부의 예측도 보기좋게 빗나갔다. 엄청난 수량을 견디지 못한 호수, 조정지, 외부수로는 다 범람한 뒤 하나가 되어 주민들의 거주지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다마얀 지역에 세 살 먹은 아이가 목숨을 잃은 것도 이 때 였다. 이에 대해 이 지역 주민 줄리우스씨는 "제방이 지어지지 않은 지역은 태풍이 지난 간 뒤 한 달이 지났는데도 물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정부의 사정을 다 이해해 주면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우리의 터전만 지켜달라며 협정까지 맺었는데, 그 많은 돈을 어디다가 쓰고 이제 와서 돈이 없다고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공사가 중단될 때만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던 주민들은 이번 태풍 피해 이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여러 차례 대통령 궁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지난 달, NGO 씨오엠의 중재로 만난 메트로 마닐라 개발공사(MMDA, 현재 해당 프로젝트 주관 청)와의 회의에서 "당장 제방공사를 재개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자리에서 메트로 마닐라 개발공사 페르난도 사장은 "당장 150만페소(약 3억8천만 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공사를 재개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사재개를 한답시고 온 자재라는 게 돌이나 흙이 아닌 생활 쓰레기들이더라고. 그걸로 제방을 쌓는다는 거지."

주민조직 대표인 루디씨는 웃으며 내게 이런 사실을 전했다. 애초부터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잠겨있는 다마얀 지역.
 여전히 잠겨있는 다마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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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부터 여기살던 우리가 수질오염과 불법점거의 원인이랍니다!"

아로요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민조직 대표 벨리아씨는 부쩍 법안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손바닥 뒤집 듯 바뀌는 법안도 문제였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마얀 사람들이 범법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에 발표된 대통령 령 1160조, 제방 공사가 마무리 되었어야 할 시점에 발표된 저 법안 때문에 다마얀 사람들은 몇 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법안엔 우리가 라구나 호수 지역을 불법 점거하고, 수질 오염의 근원적 원인이기에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 원인으로 호수가 오염되고 침수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우리 지역에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할 거라 1994년 발표되었던 대통령 령 458조는 이 법안으로 인해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주민조직은 이나레스 리잘(해당 지역 주) 주지사에게 공식 공문을 보내서 "기존의 중앙정부가 약속한 제방만 짓는다면 지금 벌어지는 모든 불미스러운 일은 해결될 것"이라며 공사 재개를 촉구했다. 중앙정부는 이제 더이상 믿을 수 없다는 인식 탓이었다. 하지만 지방 정부로부터도 그들은 뚜렷한 답을 듣지 못했다.

수십 년간 호수 근처에 살아왔던 다마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설 때 야기될 환경 오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어야 한다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최대환 환경적이고 연구가 진행된 제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그것마저 지켜지 않아 4500여 가구 중 1500여 가구가 태풍이 지나간지 두 달이 다 되가는 아직까지 잠겨 있으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조정지(수위조절을 위한 인공호)의 모습, 라구나 호수의 수위 조절은 이같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던 정부의 기존 주장은 호수, 조정지, 그리고 외부수로까지 같이 범람하여 다마얀 지역으로 들어치는 물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조정지(수위조절을 위한 인공호)의 모습, 라구나 호수의 수위 조절은 이같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던 정부의 기존 주장은 호수, 조정지, 그리고 외부수로까지 같이 범람하여 다마얀 지역으로 들어치는 물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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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인지, 4대강인지, 어찌됐든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한국에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다마얀 어부 깐시오씨는 그런 관점에 대해 이렇게 응수한다.

"기술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메트로 마닐라의 홍수 조절을 한답시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본들 호수가 버틸 수 있는 한계라는 건 존재합니다. 우리가 전기 충격을 이용해 고기를 잡지 않으려는 것은 그렇게 하다보면 고기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이죠. 제방을 짓든 안 짓든 결국은 모두 부질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살아야 하니까요."

다마얀 어부 '깐시오' 씨. 하루 종일 바다에 나가 생선 한 마리를 잡은 날, 그는 댓가로 100페소(약 2500원)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마얀 어부 '깐시오' 씨. 하루 종일 바다에 나가 생선 한 마리를 잡은 날, 그는 댓가로 100페소(약 2500원)를 받을 수 있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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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지금도 제방을 쌓아달라고 요구한다. 그 슬픈 요구는 분명히 관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이제 무엇을,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다마얀' 마을은 어떤 곳?
다마얀(Damayan)은 필리핀 최대 호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45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다마얀은 호수 및 도시와 가까운 탓에 직업을 구하기 쉽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마얀은 지난 십수년간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가면서 겪었고 개발과 환경오염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 도시빈민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1) 라구나 호수는 22개 강의 지류가 만나며, 23종이 넘는 어류와, 새우, 조개 종류가 서식하며, 주변 지역에서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도 많이 생산되었다. - 현재 5종 남짓 어종, 어획량 감소, 농사 지역 상습 침수 - 파식 강을 통해 마닐라 인근해역과 물을 주고 받은 라구나 호수는, 이런 조건이 호수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나 나핀단 수력 통제소(Napindan Hydraulic Control)이 길을 막은 뒤 호수의 오염도가 급격하게 심해진다.(참조 : <개발사업에의 주민참여와 NGO의 역할> 2004. 2. 정법모 저)



태그:#다마얀, #라구나 호수, #필리핀 빈민,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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