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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을 출입하던 2002년 3월이다. 고 전철환 총재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어 후임 총재가 늘 화제였다. 누군가 "재경부(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이 오면 안 되나"고 말을 던졌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지만 기자들에게 대놓고 면박 줄 수 없는 공보실 직원이 돌려서 대답을 했다.

 

"제3세계 어디서는 군인 출신이 중앙은행 총재하는 나라도 있나 봅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후임 한국은행 총재와 관련한 글(관련기사)을 기고했었다. 제목을 '강만수 일 바에는 차라리 군 출신 인사를 임명해라'고 달아서 보냈다. 2002년 오간 대화를 생각하면서 붙인 제목이었다.

 

제목이 오마이뉴스의 편집 방침과 맞지 않았는지 편집자가 바꿨지만 고맙게도 잉걸뉴스로 채택을 해줬다. 바뀐 제목은 '실패한 재무관료 강만수'라는 점에 더 비중이 주어졌다. 제목은 어디까지나 편집기자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므로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편집기자들의 솜씨로 달린 좋은 제목을 보고 있으면 당초의 내 제목으로 나갔더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생각하게 되는 사례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초 '강만수보다 군 출신이 낫다'고 한 건 본심과 달리 자극적인 제목을 달기 위해 갖다 붙인 말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은행 총재에 관한한 그게 덜 부정적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중앙은행 총재에 관한 한 재무관료 일 바에는 차라리 군인이 낫다'는 것이다.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외환위기 때의 '실패한 관료'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다. 참여정부 때의 이헌재 한덕수 전 부총리가 한은 총재 후보로 거론된다고 해도 강만수 위원장보다 더 좋은 소리를 들을 게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재무 관료에게 중앙은행을 맡기는 것이 위험천만한 것임을 지적하려고 한다. 고양이가 생선 지키는 꼴이다. 제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는 나라에서 재무부와 중앙은행 인맥이 뒤섞이는 나라는 없다.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경제를 이끌어가는 당국기관의 양대 축이지만 그 관계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이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집권당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와 무관한 얘기다. 이전 정권에서도 금리를 끌어내리기 위한 재무 관료나 출신들의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행위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금융통화위원으로 기획재정부 출신이 보란 듯이 부임하는 관행도 국제 금융계에서는 낯 뜨거운 일이다.

 

심지어 한국은행이 마련한 안이 금통위원들의 반란으로 부결되고 금리 인하가 단행되는 일이 가능한 나라다. 전에 밝혔듯 이성태 총재가 부총재 시절, "나는 금리인하에 반대한다"는 의사록을 남길 때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이젠 아예 대놓고 전임 재무장관을 중앙은행 총재로 거론하다니.

 

2000년대 초반,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들은 가끔 원장으로부터 "한은과 재경부 사이에 균형 잡힌 글 좀 쓰라"고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균형 잡힌' 글이라고 내논 것들이 모두 '금리를 내리라'는 내용들이었다. 그때 KDI 원장이 강봉균 민주당 의원이다.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지낸 정통 재무 관료다.

 

2000년 5월, 금융정책협의회를 마친 권오규 재경부 국장(나중의 부총리)이 이상한 말을 했다.

 

"심훈 한은 부총재가 금리 인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이든 아니든 재경부 국장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금리에 관한 FRB의 성역을 잘못 건드리면 백악관도 곧바로 해명하는 미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일개 국장의 발언이었다. 금통위원들에 대한 압박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 해 9월엔 역대 최고 총재로 평가되는 고 전철환 총재조차 금통위원들의 반란으로 인해 금리 인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박승 총재가 한국은행에 부임할 무렵 진념 재경부총리는 "나하고 호흡이 잘 맞을 분"이라고 대놓고 밝혔다.

 

이 모두 통화정책이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망발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한국의 통화정책에서 재무부와 중앙은행간 얼마나 불균형 구조가 심각한지를 드러내고 있다. 균형을 상실한 통화정책은 끝내 정권에도 부담을 몰고 오게 된다.

 

이같은 불균형 속에서도 그나마 총재만큼은 재무 관료들이 넘보기 어려운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그마저도 무너지는 모습이 이번에 나타났다. 그래서 차라리 군 출신이 그보다는 덜 나쁠 것이라 여기기에 이르렀다. 80년대 군사통치 기간은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만약 군 출신 인사가 한국은행 총재에 부임하면 1층 로비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물가 안정'을 보면서 더욱 심기일전 할 테니 금리 내리는 법만 아는 재무 관료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2% 정책금리를 보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말을 듣는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똑똑하다고 소문 나신 분들이 그렇게 자신이 없나. 유독 한국의 재무 관료들만 통화정책까지 손에 쥐어줘야 성장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기획재정부의 드높은 자부심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이 땅에서 아예 사라지길 바란다.


태그:#한국은행 총재, #강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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