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들오름 서쪽에 자리잡은 도두항은 이전에 본 작은 포구들과는 달리 '항구'이니 꽤 넓은 바다를 품고 있다. 그 위엔 많은 어선과 가두리가 있고, 갈매기들도 여럿 있고, 가마우지도 한 마리 보인다.

 

따뜻한 날에 길다란 방파제를 따라 걸으면 기분이 좋다. 시원한 바람, 푸른 하늘 그리고 파란 바다, 빨간 등대, 낚시하는 사람들, 모두 평화로운 정경이다. 몇 해 전엔 길고양이들이 제 영역이라고 이리 저리 뜀박질하는 모습도 정겨웠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어부나 낚시꾼들이 버린 물고기들을 먹이로 삼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도두항과 이어진 일대는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들이 대부분이고 살림집들은 보다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해안도로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는 것인데, 앞서 말한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얻은 땅이다. 지구에 존재한 지 십 몇 년쯤 밖에 안 되는 '새 땅'인 것이다.

 

이러한 매립은 서쪽으로 이어진 해안도로가 끝나는 이호해수욕장 부근에서도 만나게 된다. 이미 매립은 완료되어 노란꽃을 피운 유채가 자라고 있는 넓은 땅에 또 새로운 건물과 시설이 들어설 것이다. 해군기지로 결정된 서귀포시 강정동에서도 이루어질 예정이니 그 때쯤이면 제주도 지도를 새로 마련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큰 길이 나고 대규모의 토목, 건설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을과 개인에게 큰 이익이 올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이 곳에서 만난 어르신도 지난 번 찾았던 도들오름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하고 계셨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았지만 최근 산책로 공사로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평가이다. 실제로 관광버스 여러 대가 와서 길가에 세우고 사람들이 오름을 거닐게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와서 경제적 이득이 낱낱에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또한 이런 공사들이 불러오는 환경, 문화, 역사적 폐해들에 대한 각성이 미미한 것도 아쉬운 모습이다.

 

살림집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을다운 마을을 이제사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기준에 따르면, 마을다운 마을은 '골목이 좁아 집들을 가까이 대할 수 있고, 오래된 팽나무가 있고, 초가가 있는 것' 쯤이다.

 

탑동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이 조건을 갖춘 곳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애써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아마도 도시 냄새, 또는 관광지 냄새가 많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굳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같은 제주도 안에 살면서도 내가 도시 언저리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는 풍경이 아닌 곳을 보고 싶어한 것이리라.

 

마을로 들어가는 동선에는 꽤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이 곳도 절반 이상은 바다를 매립한 공간이다. 그 초입에 작은 샘물이 자리하고 있다. 타일로 외벽을 감싸고 지붕까지 마련된 '현대식 샘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이용하도록 두 군데로 나눠져 있다. 이름을 몰랐었는데 어르신께 물으니 '마강물'이라고 한다.

 

주차장 끝, 남쪽에도 지붕 위에 작은 지붕이 하나 더 놓인 큰 건물이 두 군데 있다. 처음 보면 과연 무슨 용도로 지은 것일까 궁금해질 법한 이 건물 안에는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샘물이 흐른다. 이곳이 바로 '오래물'이라는 샘물터이다. 오래물은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이어서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서까지 원정와 몸을 담그는 샘물터라 한다.

 

하지만, 이 샘물터의 뒤쪽에 조그만 수로가 있어 위쪽에서 물이 흐르니 연관이 있지 않나 궁금하던 차였다. 그 어르신이 고맙게도 해답을 말씀해 주신다.

 

이 '오래물'은 한라산에서부터 타고 내려오는 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로의 물도, 이 '오래물'에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도 한 몸인 게다. 그러니, 오래물은 지하 암반을 뚫고 솟는 '용천수'라고 부르는 샘물터는 아닌 것이다. 가뭄이 심하면 이 곳 물도 말라버린다니 역시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다.

 

내부로 들어오면 '아니, 이건 목욕탕?' 하는 소리가 나오게 꾸며 놓았다. 옛스러운 모습을 상상했다면 꽤 실망할 테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 곳을 아직도 애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위로해야 할 법하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오래물은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엔 일본군이 이 오래물을 도들오름을 거쳐 비행장에 끌어다 대려다 만 일도 있었다고 하니, 역사의 한 현장이기도 하다. 마을은 도들오름 자락이라고 여겨도 좋을 언덕지대로 이루어진 지형이다. 그러나 그 경사가 심한 정도는 아닌지라 차라리 올망졸망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오래물 곁에 난 길로 몇 발짝 오르면 언덕에 널직한 공간이 나온다. 곁엔 작은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상점이 두 군데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놀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마을 안 광장쯤 된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팽나무 둘레의자엔 초등학생 몇몇이 앉아 군것질을 하고 있고, 청소년도 여럿 보이니 마을이 생기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실상은 어떠할 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하는 어릴 적 돌아다녔던 길과 비슷한 골목을 거닐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초가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그러나 사람사는 집은 없다. 골목길을 갑자기 집이 떡하니 막아서는 이른바 '막은창'도 만나 섭섭한 척하기도 하고, 모처럼 봄볕에 일광욕하러 나온 방울달린 고양이를 만나 반가워 하기도 한다.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바람에 살랑대는 빨래들도 몰래 훔쳐보다가 개 짖는 소리에 껌쩍 놀라 발길을 돌린다. 개는 제 몫을 다 하는 것이지만 눈으로만 도적질하는 나는 개의 이런 맹목적인 충성심이 싫다. 개들이 독심술을 익히지 않는 이상 여행하는 내내 이 '앙숙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막다른 골목, 막은창에서 또 개와 마주쳤다. 그런데 이 집은 대문이 아예 없다. 그렇다고 정주석과 정낭으로 막음한 것도 아니다. 마침 마당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온다. 가벼이 웃으며 문이 없어 신기하다고 하니 영 귀찮고 의심스러운 투다. 이러면 억울해지는데 말이다. 골목을 다니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붙여봐도 의심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멋적게 웃다가 쫓기듯 돌아선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말 몇 마디로 의심을 떨구고 반갑게 대화를 하는데 참 드문 일이다. 속으로 섭섭한 마음이 드니 "그리 두려우면 담장 높이 치고 대문도 단단하게 만드시지요"라고 말했다. 물론 속으로만 그랬다.

 

돌아가는 길에 버려진 유리병을 보란 듯이 주워들었다.

 

"호호호. 쓰레기까지 주우니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네."

 

씁쓸하였다. 마침 동행했던 친구 녀석의 큰 몸집이 떠올랐다.

 

"야, 이렇게 박대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아. 크크크."

"허허허허. 그런가보다."

 

녀석의 한때 별명이 '산적'이었음을 빌어 농짓꺼리나 해보며 확 풀고 또 길을 걷는다. 이런 일도 겪어 보니 그것이 어떤 방식의 여행이 되었든 '여행은 삶의 연장이다'는 생각이 든다. 궂은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고, 감동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슬픔에 처절히 울기도 한다. 시공을 달리해서 그 느낌이 다르게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는 것이 일상과 여행이 갈리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곳 집들의 창문은 아주 단단하다. 여러 번 다루었지만, 이곳도 비행장과 가까워서 비행기 소음 때문에 대화를 멈추곤 해야 한다. 집들 대부분이 보상을 받아 튼튼한 이중 창문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살아보면서 몸소 느껴봐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짐작만으로는 이 비행기 소음을 빼면 이 마을은 참으로 아늑하여 편안히 지낼 만한 곳이다.

 

이쯤에서 마을 구경을 마치고 마을을 나와 예정대로 서쪽으로 향한다. 슬슬 제주시 해안도로의 끝이 보인다. 다음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 근데 아까 그 샘물 이름이 뭐였냐?"

"어?"

"나장물? 마…뭐시기인가?"

"어? 모르겠는데?"

"에이그그그…."

 

오래물 뒤편에 놓인 노인회관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어르신 가신 방향이 이쪽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회관 옆쪽 길로 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아마 나와서 댁으로 가시나 보다.

 

"선생님~~~!"

뒤돌아 보신다.

"아까 그 물 이름이 뭐꽈?"

"마~가앙~물"

"마…뭐마씸?"

"마! 강! 물!!"

"아, 마강물~! 고맙수다, 예!"

 

꾸벅 절하고 뒷통수를 때리는 '츳츳' 소리를 뒤로하며 재빨리 뛰어 돌아갔다.


태그:#도두 마을, #제주도, #제주여행, #제주도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