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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부터 도덕경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던 국어선생님 덕에 노장사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도덕경과 장자를 찾아 읽게 되고 어린 나이에 자연, 도, 허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영웅본색 같은 홍콩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오우삼 감독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영화비평을 읽으며 미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생겼다. 20살엔 무비카메라에 빠져 영상 미학을 공부하고,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연출을 어렵사리 구해 정말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어렵게 읽어본 적도 있었다.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 일에 미쳐서.
 
인문학을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었지만,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 집에선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이 부모님의 바람이었고, 그런 직장을 얻는 데 필요한 내신점수와 수능공부에 인문학은 별반 쓸모가 없었다. 대입과 취업 준비 속에 생존을 위한 경쟁이 내 영혼을 잠식하였고, 소년 시절의 인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이 사그라졌다.

겨우 교사가 되었고, 공무원의 신분을 얻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즐겁지 않았다.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기존 사회의 질서와 예절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요를 일삼으며, 체제의 마름으로 일하다 보니 32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해에 나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주로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두었다. 나의 모순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클레멘트 코스에 관한 기사는 인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을 다시 살려주었다. 인문학의 사회변혁의 가능성에 관한 낙관적인 기대로 가득해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이 아니라 인문학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노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시작을 선물하는 변혁의 주체로서의 인문학의 가능성. 내가 그동안 쓸모없는 것, 생존하는데 별반 도움 되지 않는 것으로 분류하고 어린 시절 추억으로 묻어버린 아련한 이름의 인문학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처럼 느꼈다.

그 뒤로 난 다시 헨리 데이빗 서로우, 노움 촘스키, 함석헌 등의 저작에 빠져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지방의 아이들에게도 대도시의 아이들 못지않은 살아있는 인문학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임용고사 준비만 하느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배운 것도 적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어가며 인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싶었다. 3년 정도 책을 읽고 관심도 깊어져서 올 해에 드디어 동아리를 만들었다. 글쓰기가 재밌고, 토론이 즐겁다. 아이들이 새로운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 정답을 말하는 것보다 좋다.

하지만, 작년에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후로 스펙을 쌓기 위해 이런 저런 대회에 대한 정보를 유심히 살펴보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대회를 찾아주는 선생님의 모습이 많아졌다. 한 독서신문에 실린 광고에 스펙 쌓기 좋은 대회가 나왔다. 인문고전 독후감 대회가 주니어 김영사 주최, 중앙일보 후원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아직 입학사정관제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대회 참가를 권유했다. 몇몇 아이들이 인문고전을 읽기 시작하고, 그렇게 읽으라고 추천해줘도 읽지 않던, 도서관에서 전혀 대출이 되지 않던 목민심서, 꿈의 해석, 군주론, 노자 도덕경 등이 늘 지키던 자리를 비워두니 허전하기도 하지만, 흐뭇했다.

들뜬 기분으로, 또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명분으로 일반부에 나도 감상문을 내볼까 생각해보았다. 그리 내키지 않았다. 일단 조중동 폐간운동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터라 중앙일보 주최라는게 마음에 걸렸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반대하는 의미로 삼성 불매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나로서도 삼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중앙일보에서 실시하는 대회에 글을 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문학이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인문학이 살기 힘든 사회의 토양을 만들고 있는 회사의 대회에 참여하는 이 모순적인 행동이 나를 붙잡았다.
 
입학사정관제를 염두에 두고 마지못해 인문도서 독후감을 작성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인문학을 통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와 배운 것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키워주고, 내가 인문학에 자연스레 빠졌던 것처럼, 배움의 즐거움을, 공부하는 즐거움을 동아리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겠다던 나의 첫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입학사정관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하지 않았나? 이런 저런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최근 김상봉 교수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서평이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건을 보면서 느꼈다. 빠른 길은 어쩌면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언론이 생존하기 위해 삼성과 같은 대기업으로부터의 광고수입에 의존했던 것이 지금은 언론의 존재의 이유를 위협하고 있다. 어렵더라도 구독료 중심의 경영을 추구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을 법도 하다.

인문학을 하는 분들도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에 의존할 수도 있다. 인문학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경쟁 구도를 강화하는 대입 전형에 기대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언론들처럼 인문학도 설 자리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대답은 리 호이나키의 책 제목에 있다고 본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자. 이 다짐으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부끄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일 비틀거리더라도 오늘 바르게 가자.

덧붙이는 글 | 전교조 교육희망에 기사를 송고하였습니다.



태그:#인문학, #중앙일보, #입학사정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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